그녀를 찾아온 그
유정은 우리 중에 가방끈이 제일 길고 현재 무려 교수님이지만 또 우리 중에 일반 상식이 제일 부족하기도 하다. 딱 자기 분야에 대해서만 공부하고 성과를 내는 타입이다. 그런 유정이지만 설마 ‘불혹’을 모를까 싶은 생각 반, 모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 반이라 대답이 기대되긴 했다.
마흔이 마흔이지 뭐긴 뭐야~그리고 난 빠른 년생이라 아직 마흔 아니거든~
마흔의 다른 이름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커녕 아니 굳이 다른 이름을 알아야 하냐는 저 당당한 태도와 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 늙어가는 주제에 자기만 2월생이라고 선긋기 하는 유치 찬란함에 은재도 질문을 한 륜도 할 말을 잃었다.
상대방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유정의 주특기이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의 유일한 낙은 시험이 끝난 날,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분식집까지 걸어가 즉석떡볶이를 시켜먹던 시간이었다. 즉떡 4인분에 각종 사리 추가. 어떤 날은 우동사리에 계란 5개, 만두 10개. 어떤 날은 쫄면 사리에 만두 5개, 김말이 10개.
그러던 어느 날, 유정이 사리를 종류별로 다 시키자고 했다. 자기는 오늘 꼭 하나씩 다 먹어야겠다고 했다. 라면, 우동, 쫄면, 면만 3종류에, 계란, 만두, 김말이에 평소엔 먹지도 않았던 소시지와 오뎅까지 다 시키자고 했다. 당연히 나머지 넷은 너무 많다며 말렸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관철시키고야 마는 유정의 집중력과 끈기로 결국 우리는 사리를 종류별로 다 시키고야 말았다. 즉떡을 4인분이 아니라 2인분 정도만 시켰으면 평소의 양과 큰 차이는 없었을 텐데 다들 요령이 부족한 고등학생이었다 보니 그 생각은 못하고 아주머니가 큰 냄비 2개에 나누어 가지고 오실 때에야 우리가 시킨 것이 얼마나 많은 양인지 실감하게 되었다.
과장법을 좀 보태 라면, 우동, 쫄면 각 한 줄기씩과 계란, 만두, 김말이, 소시지, 오뎅을 딱 한 점씩 먹고 난 후 유정은 다 먹었다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단골집인데 음식을 남기기가 차마 죄송스러웠다면 남은 걸 싸 달라고 했어도 되었을 텐데 역시나 그런 말을 할 뻔뻔함도 없었던 우리는 두 냄비에 든 떡볶이를 꾸역꾸역 다 먹었고, 그 후로 몇 개월 동안 그 누구 하나 떡볶이의 ‘떡’ 자도 입에 올리지 않았었다.
그런 유정이지만, 그래도 유정은 우리들에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철저한 자기 관리 덕분에 그리고 실제로 나이도 제일 어리니까 어쨌든 우리 중에 제일 동안이어서 유정과 대화할 때만큼은 우리 모두 늘어가는 흰머리와 깊어가는 팔자주름을 싹 잊어버리고 좀 요령 없고 덜 뻔뻔했기에 순수했던 그때 그 시절로 자연스럽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지만 잡티 하나 없는 피부와 탄탄한 몸매가 부럽기도 하고 그 부러움이 동기부여가 되어 다들 유정을 만나고 온 뒤에는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기 관리 모드를 시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모드가 짧게 끝나는 게 문제이지만.
륜이 불혹에 대해 유정에게 알려줄 마음이 없어 보여 은재가 대신 간략하게 정리해주려는데, 유정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나온다.
그날, 성준이가 날 찾아왔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