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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마흔_02

마흔의 다른 이름

by 나우히어


수민은 항상 그런 식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킨 적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늦게 오거나 일찍 가거나 둘 다 하거나. 그래도 나오면 다행이고 정말 갑작스럽게 못 나온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녀가 못 나온다고 하면 그래도 다 같이 만나야지 하며 약속을 다시 잡곤 했는데, 그런 일이 너무 많아지다 보니 이제는 다들 그녀 빼고 우선 만난다. 만나고 있다 보면 또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추는 경우가 많으니까.


우리의 곗돈이 많이 쌓인 데는 수민의 역할이 컸다. 5명 전원이 모일 때만 쓰기로 했기에 공금을 쓸 기회가 많이 없었고, 또 우리 중에 제일 잘 살아서 늦게 오면 늦게 오는 대로 일찍 가면 일찍 가는 대로 미안해서 밥값이든 찻값이든 술값이든 다 계산을 해버리니 이래저래 공금은 차곡차곡 쌓여만 가는 것이다. 그리고 타고난 다정함으로 잠깐만 있다 가는 동안에도 4명에게 골고루 눈을 맞춰주며 얘기를 들어주고 손을 잡아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주기에 수민에게 큰 불만은 없었다. 한 명만 빼고.


에휴, 또 무슨 일이길래.
잠깐이라도 와. 얼굴 좀 보자~
올 때까지 있을 테니까 늦게라도 와라.


다들 수민의 부재에는 익숙한 듯 덤덤한 답장들이 올라왔다. 그렇게 효인과 수민을 빼고 은재, 륜, 유정 셋이 만나게 되었다.


수민을 빼고 나머지 넷은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 2학년 때 전학 온 수민과는 2년 내내. 그 이후로 22년. 인생의 반 이상을 알고 지낸 사이들이다. 아무리 오래되고 친한 사이여도 1:1로는 어색한 사이가 있다. 그게 바로 륜과 유정이다. 그 어색함을 제일 먼저 알았던 건 역시 눈치가 가장 빠른 은재였다.


의대생이었던 유정이 국가고시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고 축하파티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아직 학생이었던 유정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일을 하던 때라 주인공인 유정이 제일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유정은 자신이 관심 있어하는 것과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고도의 집중력과 끈기를 발휘하지만 나머지 일과 사람에 대해서는 적당히를 넘어 무관심한 편이다. 반면, 륜은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 특히 강자보다 약자의 편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필요하면 자신이 총대를 멜 줄도 아는 사람이다. 마흔이 된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둘은 참 반대여서 어떻게 친구가 되었을까 싶다. 만약 그 둘이 회사 입사 동기였다면, 산후조리원 동기였다면 과연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그 둘은 아니 어쩌면 우리 다섯은 고등학교에서 만난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직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약속 장소에 모두 모이기 전까지 서로서로 여러 차례 문자를 주고받았었다. 5명 중 은재는 주로 문자를 받는 쪽이었다.


어디야? 난 거의 다 왔어.
난 10분 뒤 도착. 먼저 들어가 있어. 유정이 왔대.
나 조금 늦을 것 같아. 미안~어디쯤?
난 10분 뒤 도착. 조심히 와~
나 도착. 유정이 만났어. 넌 언제 와?
난 10분 뒤 도착. 뭐 시킬지 고르고 있어~


그렇게 10분 뒤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는데, 제일 먼저 문자를 보냈던, 거의 다 왔다고 했던 륜은 보이지 않았다. 륜은 은재가 도착한 직후에 들어왔다. 마치 상황을 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은재는 알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륜이 유정과 단둘이 있어야 하는 상황을 피했던 게.


정작 타인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유정은 륜의 그런 태도를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별반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지나칠 정도로 탁월한 은재는 그날 이후, 둘만 있게 되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었다.


그러다 보니 매번 제일 먼저 도착하는 사람, 자리를 잡아 놓는 사람, 주문을 해놓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날도 은재, 륜, 유정의 순서로 도착을 했다.


유정은 앉자마자 메뉴판을 보며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고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며, 수민이도 왔으면 4가지 시킬 수 있는데, 3가지밖에 못 시킨다며 투정을 부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상황인데, 불쑥 륜이 말했다.


너, 공자가 마흔을 뭐라고 했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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