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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마흔_08

첫인상의 중요성

by 나우히어

각자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마음이 복잡한 터라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데, 그 침묵을 깬 건 륜이었다.


예은이 아빠 회사 짤렸어.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륜의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모두 륜이의 부모가 된 심정으로 속으로 결혼을 뜯어말렸던 인물이다.


륜은 결혼 전에 3번의 연애를 했는데, 그 3번째 남자가 지금의 남편이다. 아직 만으로는 20대라고 우길 수 있었던 그때, 효인과 륜을 빼고는 어느덧 다 결혼을 했던 그때, 륜이 결혼할 사람이 있다며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싶다고 했다. 연애 자체도 많이 안 했지만 한 번도 본인이 만나는 남자를 우리에게 공개한 적이 없었던 륜이기에 모두 놀라기도 했고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11월의 어느 평일 저녁, 마침 수능이 끝난 시기라 효인이도 9시까지는 나올 수 있겠다고 하여 효인이 학원 근처에서 모이기로 했다. 그날따라 평소에 주로 늦는 편인 수민이까지 웬일로 시간을 맞춰 나왔는데 정작 주인공인 륜의 남자 친구는 거의 30분이나 늦게 나타났었다. 다들 티는 안 내고 륜의 러브스토리를 듣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첫 만남에 이렇게 늦는 남자 별론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9시 30분쯤, 어떤 머리가 벗겨진 후줄근한 아저씨가 우리 테이블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유정은 ‘아~남자들도 관리를 해야 하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륜의 옆자리에 앉자 너무 놀라 표정관리가 안 될 정도였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좋지 않은 태도라고 머리로는 누누이 되뇌지만, 사람의 첫인상이 주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그런데 이어지는 그 남자의 태도가 더 가관이었다.

자신이 늦은 것에 대한 사과는커녕, 왜 굳이 강남까지 오라고 하냐는 불만 섞인 표정과 말투, 메뉴판을 보더니 가격이 너무 비싸다며 투덜, 온몸에서 풍기는 찌든 담배 냄새. 솔직히 어디 하나 호감인 부분이 없는 사람이었다. 부모님이 탐탁지 않아하신다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만나보니 륜이 부모님의 마음이 100% 이해되고도 남았다.


그날 이후, 륜은 부모님의 거센 반대에 온몸으로 저항해 결국 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 후 알게 된 조건은 정말 더 가관이었다.


우리보다 9살 많음, 여든을 바라보시는 홀시아버지, 그리고 3살 더 많은 우리와 띠동갑인 결혼 안 한 누나까지. 회사에서는 만년 과장. 아 정말 아무리 연애 경험이 없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보는 눈이 없는 걸까, 도대체 륜이는 그 남자의 어떤 부분 때문에 결혼을 결심하게 된 걸까, 너무 궁금했었지만, 아무리 친해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거기에 누구 하나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했었다.

결혼 후 2년 뒤 딸 하나, 다시 5년 뒤 아들 하나 낳고, 홀시아버지 건물에 들어가 평일에는 아침저녁 두 끼, 주말에는 거의 삼시 세끼 차리는 륜을 보며 저 사람이 대학생 때 학생회장을 했던, 한때 대기업에서 큰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우리 중에 제일 페미니스트에 가까웠던 사람이 맞는지 신기했었다.


저녁이면 꼭 반주를 하는 부자의 오래고도 참 안 좋은 습관 덕분에 저녁식사때마다 술안주 될 만한 음식이 하나씩은 꼭 있어야 했고, 음식에 맞는 소스를 중시하시는 시아버님 덕분에 매 끼니 개인당 소스 그릇만 수두룩하게 나온다는 얘기, 시어머니가 없는 대신 어쭙잖게 간섭하는 한 다리 건넌 시어른들 때문에 제사 때마다 스트레스받는다는 얘기, 결혼을 안 해 신경 쓸 가족이 없어서인지 꾸민다고 달라질 것 같지도 않은 동생의 외모에 신경을 쓰느라 집에 올 때마다 옷장을 벌컥벌컥 열어보며 륜에게 잔소리를 하는 손위 시누이 얘기에서 우리는 속으로 ‘나는 너무 행복한 거구나’ 했었다.

그래도 만년 과장이었던 남편이 4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갈 즈음, 그러니까 비교적 최근에야 부장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에 ‘그래, 돈이라도 꼬박꼬박 벌어다 줘야지.’ 했는데, 그런 남편이 회사에서 잘렸다니, 이게 무슨 우울한 소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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