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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마흔_07

이제라도 vs 이제와서

by 나우히어

10년 전이면, 효인과 성준의 길고 긴 인연이 타의에 의해 강제로 종료되었던, 아니 종료되었다고 당사자들도 생각했던 그때였다. 그 다사다난했던 그리고 마지막에는 갖은 수모로 점철되었던 연애를 끝낸 후에도 효인은 계속 학원에 나가고, 학생들에게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주고, 강남 엄마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지내길래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런데 모두에게는 말 못 했지만 수민에게만은, 한 명에게만은 말할 이야기가 털어놓아야 하는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수민의 이야기는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나도 처음엔 성준이와 헤어져서 많이 힘들구나, 그렇게만 생각했어. 그리고 자연스럽게 성준의 어머니에 대한 흉을 보게 되었지. 어떻게 너희 부모님과 너 일하는 곳을 찾아가서까지 널 모욕을 주냐고, 너무했다고.



하지만 효인은 자기가 성준의 엄마를 욕하자 화를 냈다고 했다.

그분은 성준이 엄마잖아. 그럴 수 있는 거지. 가만히 있는 아니 오히려 날 구렁텅이로 등 떠미는 우리 엄마보다 나은 거 아니니?



원래부터 아주 잘 살았던 수민이네, 고만고만한 중산층이었던 은재와 륜이네, 그 중간이었던 유정이네 부모님에 비해 효인이네 부모님의 형편이 많이 안 좋기는 했었다. 방학 때면 한 명의 집에 모여 작은 침대에 둘러앉아 밤새 수다 꽃을 피울 때도 그 장소가 효인이네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일 많이 갔던 집은 당연히 제일 넓었던 수민이네였고, 은재, 륜, 유정이네는 비슷하게 번갈아가면서 드나들었었다. 제일 눈치가 없는 편인 유정이가 이번에는 효인이네 가자 가자 할 때마다 륜과 은재가 자기 집으로 가자고 쉴드를 쳐줬었다.

사실 효인이는 성준이 영국을 다녀오고 자신이 학원 수업으로 한창 바빴던 때, 헤어지려고 했었다는 걸 수민이도 그날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즈음 어떻게 알았는지 성준이의 연락처를 알아낸 효인이의 엄마는 성준이를 만나 부탁을 했다고 한다. 효인이 좀 잡아달라고, 계속 만나 달라고, 시부모님께 인정을 받지 않아도 좋고, 구박을 받아도 좋으니 같이 살아만 달라고.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성준은 그 말을 효인에게는 전하지 않고, 대신 헤어지자는 효인을 계속 잡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니까. 한참 후에 엄마가 성준을 만났었고, 그런 부탁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효인은 다시는 엄마를 보지 않겠다 다짐했었다고 했다. 성준과 만날 때마다 초라해지는 수축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 버텨왔는데, 엄마라는 사람이 자신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그런 부탁을 했다는 사실은 효인을 주저앉게 만들었던 것이다. 가장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줘야 할 사람이 자신을 밑바닥으로 내몰았다는 생각에 효인은 수민을 만나 분노했었다고 했다.


그리고 성준과의 관계에서만큼은 아니지만 효인은 우리들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애를 써왔다고 했다. 특별한 어려움 없이 큰 고민 없이 비슷비슷하게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좋아 보이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런 우리들과 다른 자신의 현실 앞에서 자신과 부모를 원망하고 탓하고 부정했던 시간이 훨씬 많았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우리 중에 가장 부자인 수민에게 털어놓았다는 것이 좀 아이러니이긴 했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게 그런 걸까 싶기도 했다.


아무리 철없던 시절에 만나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도 그때 그 감성으로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주고받는 사이라지만, 마흔이 다 된 지금에 와서야 우리 중 한 명은 함께 있던 시간 때문에 자신과 가족을 부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모두들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 또 누군가는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그동안 너무 무심했네.’라고 생각하는 한편 다른 누군가는 ‘계속 잘 지내다 왜 하필 지금? 이제 와서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드는 자신을 숨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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