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제일 불행한가
남의 남편의 무능함을 탓하기도, 원래부터 위로받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륜을 어설프게 토닥여주기도 뭣해 다들 또 말이 없어진 가운데 이번에는 은재가 입을 열었다.
나는 남편한테 걸렸어.
오늘 뭐야, 누가 누가 불행한지 내기하는 거야?
불행이 뭔지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 적이 있을까 싶은 철없는 유정이 불행이라는 말을 꺼내고 만다. 50을 앞둔 남편이 회사에서 잘리면 불행한 걸까, 남편에게 숨기고 있던 무언가를 들키면 불행한 걸까, 갑자기 하던 일을 그만두고 친구들에게 말도 없이 잠수를 타면 불행해서 그러는 걸까?
뭐가 걸려? 너 설마 남편 몰래 누구 만났니? 아님 주식? 코인?
역시나 질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은재는 우리 사이에서 새도녀로 불린다. 새로운 것에 도전을 즐기는 여성의 줄임말. 20살 이후, 아니 그전부터 그녀의 인생은 다이내믹 그 자체였다. 대학교 4년이 한 곳에 머무른 제일 긴 시간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초등학교 6년 동안 3번의 전학, 중학교 때도 1번 전학, 고등학교는 3년이었으니 대학교 4년이 제일 길었다.
대학 졸업 후 뜬금없이 게임회사에 들어가 모두를 놀래키더니 1년도 안되어 제 발로 걸어 나와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다녀온 뒤 무슨 깨우침이 있었는지 갑자기 심리학을 공부해야겠다며 대학원에 들어가더니 석사논문이 통과도 되기 전에 상담 센터에 들어가 일을 하다가 결혼을 하고 2년 뒤 출산 및 육아로 인해 2년을 쉰 후, 경단녀라는 꼬리표가 무색할 만큼 또 바로 대학원 선배의 소개로 다른 곳에서 일을 3년 정도 하다가, 지도교수님 퇴임 전에 박사과정을 마치려면 지금이 기회라며 2년 전에 퇴사를 하고 다시 대학원에 들어간 것이 은재의 최근 15년 동안의 일이다.
그 와중에 연애도 우리 중에 제일 많이 하고 결혼도 제일 먼저 하고 애도 제일 먼저 낳아 딸이 벌써 초등학교 4학년이다. 또 우리 중에 책도 제일 많이 읽고 여행도 제일 자주 다니고 맛집도 제일 많이 아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들의 취향도 제일 잘 알고 있는, 그래서 우리가 만날 장소는 그녀의 여기 어때? 한 마디면 만사 오케이가 되게 하는 은재이다.
남편과도 결혼한 지 10년이 훌쩍, 결혼 전에 알고 지낸 시간이 3년 정도 되니까, 이제 뭐 15년 정도를 봐온 사이인데 뭘 숨겨야만 했는지, 또 워낙 눈치도 빠르고 임기응변에 능한 은재가 어쩌다 걸렸는지 다들 궁금해 죽겠다는 눈빛이다.
나 사실 박사과정 관뒀어.
뭐? 언제? 왜?
한 학기 다니고 2학기째 휴학했어. 물론 아직 휴학 상태니까 다시 돌아가려면 갈 순 있는데, 별로 그러고 싶진 않네.
은재와 그 남편은 그야말로 나이스한 부부관계의 표본이다. 아메리칸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각자의 생활을 최대한 존중하고, 부모님께 셀프 효도는 기본에, 집안일이나 육아도 철저하리만큼 각자의 역할을 정해놓고 그 원칙을 잘 지켜왔었다. 그래서 정말 큰 트러블 없이 10년을 잘 지내왔는데, 은재가 꽤 좋은 조건이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박사과정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둘 사이의 갈등이 좀 오래갔었다.
암튼 그렇게 나름 힘들게 다시 시작한 공부인데, 도대체 왜 한 학기만에 그만두어야만 했을까? 그동안 은재의 패턴을 돌아보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1년도 아니고 꼴랑 한 학기 만에 그만두었다는 그 이유가 궁금하기는 했다.
교수님의 비듬을 참을 수가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