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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마흔_11

이혼이 별거니

by 나우히어
너무 내 얘기만 한 것 같네. 이 또한 지나가겠지. 유정이나 수민인 별일 없지?

철없을 때 만나 여전히 함께 있으면 철없는 모습 그대로인 고등학교 동창이라지만 우리 중에 가장 철이 안 든 건 유정이다. 그 철없음을 어떨 때는 부럽다고 어떨 때는 불편하다고 어떨 때는 어색하다고 여기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당연하게 느껴왔었다.


나도 실은 할 말 있어.


웬일로 유정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뭐 그래 봐야 남편이랑 사랑싸움, 아니면 병원에 진상 환자, 아니면 남동생 부부 얘기 정도 아닐까?


나 내년에 미국 가.


역시 그럼 그렇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유정이다. 효인이도 륜도 은재도 다들 힘든 가운데 아무렇지도 않게 철없이 부러운 소리를 하다니.


우리 중에 효인이 빼고 제일 늦게 결혼을 한 유정은 남편과 처음부터 아이는 안 갖기로 합의를 했었다. 남편은 진료에 강의에 방송에 잘 나가는 그래서 항상 바쁜 편이라 유정은 자기 관리에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편이었다. 골프, 테니스, 수영, 필라테스는 기본에 피부관리와 마사지까지 꾸준히 받느라 결이 다르게 제일 바쁘기도 했었다.


너무 좋겠다~남편도 같이?
얼마나 있는 거야?
동부? 서부?


샌프란시스코, 아직은 모르겠어. 가보고 결정하려고. 남편은 안 가.

그렇게 바빠도 유정이밖에 모르는 사랑꾼 남편은 두고 혼자 간다고?


나 남편이랑 이혼해. 도장 찍는 것만 남았어.


아 오늘 무슨 날이 맞는구나.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소리인지. 남편과 가끔 냉전을 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편만 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은재, 남편을 너머 시댁 식구들 때문에 원형탈모까지 왔지만 그래도 이혼은 꿈도 꿔본 적 없는 륜, 처음부터 조건에 맞춰 애정 없는 결혼을 했기에 굳이 이혼을 생각하지 않는 수민 모두 항상 남편의 사랑을 받아 행복한 줄로만 알았던 유정의 입에서 이혼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 뒤로 나온 말은 줄줄이 충격을 넘어 공포 그 자체였다. 결혼 후 3년 동안은 너무 행복했다고 했다. 정말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을 만큼. 그런데 3년이 지나고나서부터 남편이 조금씩 달라졌다고 했다. 처음에는 바빠져서 나한테 신경을 못 쓰는 거지 싶어 골프 강습도 더 늘리고, 테니스도 시작하고 본인도 바빠지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이 부분에서 다들 유정에게 안쓰러움을 느꼈다. 마냥 여유롭게만 보였던 유정의 다양한 취미활동들이 사실은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기 위한 선택이었다니. 유정은 학창 시절 화장실 갈 때 꼭 누군가를 옆에 끼고 가야 했고, 20살 이후로 한 번도 남자 친구가 없었던 적이 없었던, 그래서 혼자서 어디를 가고 무언가를 하는 것을 우리 중에 제일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니까.


혼자 하는 취미활동들도 시들해진 유정이 큰맘 먹고 아이를 갖자고 했는데, 그 후로 남편이 더 소원해졌다고 했다. 마치 유정이 무슨 세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 그대로 털끝 하나 닿지 않게 행동했다고 했다. 한 때 그렇게 다정했던 사람이 자신이 무슨 특별한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정반대로 변한 모습에서 유정은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몰래 사람을 붙여 남편의 뒤를 캐봤다고 했다.

그렇게 알게 된 사실은 딱 <사랑과 전쟁> 그 자체였다. 남편은 유정과 결혼 전에 이미 사실혼 관계였던 사람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의 사이에 아들도 있었으며, 유정과 결혼 3년 차가 되던 그 해 딸까지 태어났던 것이다. 진료에 강의에 방송까지 그렇게 바빴던 이유는 두 집 살림을 해야 해서였고, 처음부터 아이를 갖지 말자고 했던 것도 이미 아이가 있어서였던 것이다.


두 얼굴, 배신감, 파렴치한, 쳐 죽일 놈, 이런 건 제쳐두고 그럼 대체 유정과 왜 결혼을 한 것인가?라는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이유까지 듣고 나니 미련을 두지 않고 이혼을 결정한 유정의 선택이 이해되고도 남았다. 요약하자면, 부모님이 의사와 결혼하지 않으면 병원을 안 물려주겠다고 해서였다고 한다. 그래서 유정과 정략결혼을 했고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신혼초에는 나름 최선을 다했던 것인데, 딸이 태어나자 그리고 그즈음 유정이 아이를 갖자고 하자 거리를 둔다는 게 좀 심하게 둬 유정에게 의심을 사게 됐던 것이다.


유정은 이 모든 사실을 시부모님께 알렸고, 아들에게 물려주기로 했던 재산을 이혼 전 며느리에게 주는 걸로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재산 문제만 다 정리되는 대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거라고 했다.


마흔이 되니 우리 중에 이혼녀도 생기는구나. 요즘 세상에 이혼이 별거냐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아닌 건 아니니까, 철없던 아니 철없어만 보였던 유정이 갑자기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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