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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마흔_15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by 나우히어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안 그래도 우리 중에 톤이 제일 낮은 륜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차가운 표정으로 말을 할 때면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었다. 그런 륜의 묵직함과 단호함 덕분에 우리들이 위기에서 벗어났던 순간들도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이 정색은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어린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조금은 기분이 들떠있었던 유정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 보려고 애를 썼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효인이랑 남자 친구 얘기 좀 들어보자.

그런 유정의 가벼운 태도에 대놓고 눈으로 욕을 하며 륜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난 먼저 일어날...

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피커에서 어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흰 벽면에 륜의 남편이 등장했다.


륜아, 생일 축하해~

그리고 이어 은재의 남편도 등장했다.

은재야, 생일 축하해~

세 번째로는 수민의 남동생.

누나, 생일 축하해~

그리고 마지막은 유정의 아빠.

유정아, 생일 축하해~


그렇게 네 남자의 영상 편지가 차례로 나오고 뒤이어 5명의 22년의 세월이 담긴 사진들이 아련한 노래와 함께 흘러나왔다. 유정과 은재는 이미 눈물을 닦느라 바쁘고, 수민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륜은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로 꽤나 놀란 눈치였다.


영상 어때? 우리 정우 이쪽 일 하고 있거든~
잘 만들었지?

영상은 완전 수준급 그 이상이었다. 퇴사하는 직원이 있으면 사진들을 이어 붙여서 만들어주는 그저 그런 감동 영상의 차원이 아니라 드라마 마지막 회 후에 방영되는 촬영 제작기 같은 느낌이랄까. 잘 만들어서 감동적인 건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진솔한 영상편지 때문인 건지, 22년을 함께한 추억 속 자신들의 모습 때문인 건지, 영상의 여운이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은재가 말문을 열었다.


우리 남편 인터뷰를 어떻게 한 거야? 사진도 찍기 싫어하는 사람인데~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냈다.

우리 아빤 너무 나이 들어 보이게 나왔다. 피부과 좀 모시고 가야지 안 되겠어.
예은이 아빠가 저렇게 말을 잘하는 줄 몰랐네. 대본 써 준 건가?
재민이가 매년 꽃을 보낸 거였구나~난 동생 생일 한 번도 챙겨본 적 없는데...

누나들, 저 영상 잘 만들었으니까 있어도 되죠?
저도 효인이한테 영상 편지 쓸래요~

정우의 말과 함께 문이 열리고 정우의 크루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누구는 케익을 들고 누구는 캠을 들고 누구는 선물 상자를 들고 머리에는 앙증맞은 고깔모자들을 쓰고. 그렇게 우리들의 마흔 살 생일파티는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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