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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권형 Mar 11. 2019

어느 대가의 미련한 믿음

2019년 3월 11일 [인천In] 청년칼럼 기고


 지난 2월, 오랜만에 신포동을 들렀다. 재즈클럽 버텀라인에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인천역에서 송월동 동화마을 부근을 지나 신포동으로 가는 길이 안 본 사이 많이 변해있었다. 현란하게 늘어선 노점들, 못 보던 세련된 가게들, 그러다 VR체험장이 있는 걸 보곤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날 공연에서 이런 멘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동네에 왔는데 관광 온 기분이었습니다.”

 2016년,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일어난 젠트리피케이션 분쟁 이슈를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당시 그곳엔 강제집행을 대비해 사람들이 상시 머물렀다. 예술 공간이었다는 특수성으로 그 역할을 하는 게 상당 부분 예술가들이었다는 점이 특이했다. 그리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곳에서 먹고 잤다. 사람이 없어 강제집행에 취약한 평일 월수금 오후 4시 정각마다 공연을 진행해 사람들을 모았다. 그게 내가 처음 서울에 정착하는 계기가 됐다.

 다행히 이후에 강제집행은 없었다. 테이크아웃드로잉과 건물주는 합의했다. 이후 나는 서대문 형무소 건너편, 재개발이 한창인 무악동 옥바라지 골목으로 갔다. 그곳에서도 역시 매주 월수금 오후 4시에 공연을 진행했다. 다만, 이번엔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바라지 골목은 1908년 서대문 형무소가 생긴 후 그 옥바라지를 하던 이들이 머물며 형성된 곳이다. 그래서 여관이 많았다. 재개발로 폐허가 된 옥바라지 골목의 풍경을 기억하기 위해 폐허의 전경이 보이는 마지막 여관 ‘구본장’의 옥상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테이크아웃드로잉과는 달리 머지않아 구본장은 강제집행됐다. 모든 입구가 펜스로 막히고, 간이 농성장이 만들어졌다. 무대는 옥상에서 거리로 옮겨졌다.

 한동안 공연은 계속됐지만 어떤 회의감이 들었다. 공연을 하면 거리에서 해야 하는데, 지켜야 할 공간을 뺏긴 마당에 명분 없이 뮤지션들을 거리에서 노래하게 만들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의 공연은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거나 다행스럽게도 끝까지 투쟁한 옥바라지 골목의 두 가구는 협상을 통해 보상받았다. 아마 지금 그 자리엔 롯데캐슬이 들어서고 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현장의 모두는 각자 일상으로 돌아갔다.

 “예술로 뭔가 변화시키려 한다면 그건 우스운 일입니다. 누구나 잘 살고 있으면 그걸로 된 거죠.” 지아장커의 다큐멘터리 영화 <동>에 기록된 화가 리우샤오동의 인터뷰.
 구본장 옥상에서 폐허가 된 옥바라지 골목의 풍경을 보며 수몰되어가는 싼샤의 풍경을 떠올리곤 했다. 중국 정부가 세 개의 댐을 건설하면서 수몰될 운명을 맞이하는 싼샤 지역의 풍경, 1700여개 마을이 수몰되고, 100만 명 넘는 이들이 이주했다. 영화 감독 지아장커는 사라져가는 싼샤의 풍경을 <동>과 <스틸 라이프> 두 영화에 담아 냈다.

 지아장커는 당시 싼샤의 노동자들을 그린 화가 리우샤오동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동>을 촬영하는 중,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싼샤를 보고 이야기의 필요성을 느껴 3일간 시나리오를 작성해 <스틸 라이프>를 촬영했다. 이에 대해 이렇게 인터뷰한다.
 “대신 한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외지인의 시선으로 영화를 진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싼샤에 온 지 열흘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 이곳의 삶을 찍는다면 거짓말이 탄로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술은 거짓말해선 안 된다. 그의 말처럼 거짓은 언젠가 탄로날 것이다. 내가 만약 옥바라지 골목 투쟁의 성과가 예술 덕이었다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어지러운 변화 앞에서 예술은 무력하다. 그리고 사라져가는 풍경 앞에서 할 수 있는 게 노래 뿐이었다는 건 쓸쓸한 사실이다. 그 사실이 나를 한동안 온전히 음악 활동에 매진하게 했다.

 그러다 드디어 작년 11월 정규 음반을 발매했다. 자유공원에서 타이틀곡 <교회가 있는 풍경>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다. 재미있는 사실, 연기를 해주신 배우가 다름 아닌 현재 신포동 ‘민(民)주점’을 운영하시는 조근직 사장님이라는 것. 평소 친분으로 뮤직비디오 촬영에 응해주셨는데, 촬영 현장에서 앞으로 민주점을 인수하게 됐단 얘길 처음 하셨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민주점은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 소식에 안타까워한 이들이 한둘이었겠는가. 나 역시 그랬다.

 이후 벼르고 벼르다 드디어 새로 오픈한 민주점에 간 날, 오픈한지 꽤 됐는데도 가게가 문전성시라 대기까지 해야 했다. 자리를 채운 건 대부분 민주점을 기억하는 사람들이었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 나는 그 광경이 정말 그 동네답다고 생각했다. 끈적한 향수가 엉겨붙어 있달까. 유난히 변화를 한탄하고 사라지는 걸 붙들고싶어한다. 그래서 자주 구질구질하고 가끔 처연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웃기고 또 끈질기게도 그날 그 미련한 풍광이 전혀 쓸쓸해 보이진 않았다.

 <스틸 라이프> 이후 한국에서 진행한 지아장커의 인터뷰 내용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서로를 믿는 것. 모든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지켜야하는 것. 물론 그런 것은 현실에는 이미 없어졌지요.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런 것을 믿습니다.” 이 대가의 미련한 믿음에 대해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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