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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권형 Oct 15. 2020

'찬미하지 않음'의 미덕

전유동의 음반 [관찰자로서의 숲] 리뷰

2020년 08월 24일 [인천In] 청년칼럼 기고


싱어송라이터 '전유동' 정규 1집 [관찰자로서의 숲], 책으로만 출간되었다.


 얼마 전, 지인이 겪은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그에게 (그는 5층 빌라 꼭대기 층에 거주한다) 옆집 꼬마가 부탁하기를, 집안에 들어온 벌레가 무서우니 좀 잡아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방에 가보니 무당벌레 한 마리가 천장에 매달려있어서 조심스레 밖으로 날려 보냈다고.


 무당벌레는 높은 곳에 오르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더는 오를 곳이 없을 때가 되면 날아오른다고. 무당벌레가 5층 빌라의 천장에서 발견됐다면 그는 아마 높은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으리라.


“길이 더 없다면

사뿐 날아가지

이게 다 끝이라면

팔랑 날아가지” - ‘전유동’ <무당벌레> 가사 일부


 전유동의 노래 <무당벌레>의 모티브는 그러한 무당벌레의 습성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 8월 3일 발매된 싱어송라이터 전유동의 정규 음반(혹은 출판-현물로는 책을 통해서만 유통했다-) [관찰자로서의 숲]은 ‘무당벌레’를 비롯하여 ‘이끼’, ‘그 뻐꾸기’, ‘억새’, ‘따오기’ 등 자연물의 이미지로 빽빽하다.


 실제로 음반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특정 대상을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그 대상에 관심과 애정이 없다면 잡아내기 힘든 특징들을 모티브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통해 전유동이라는 작가의 자연(혹은 그가 바라보는 대상)에 대한 그의 애정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개하는 생명에 대한 찬미”라는 음반의 캐치프레이즈는 그런 의미에서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타 연주만으로 이뤄진 1번 트랙 <참새는 귀여워>의 제목 정도를 제외하고는 자연 혹은 특정한 대상을 직접 찬미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이 음반의 미덕이 그 지점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자신을 대구 출신 뮤지션이라고 소개했다. 대구인디씬에서 활동하다 상경한 그는 (그의 표현대로) 내쫓기다시피 서울에서 인천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대구 씬에서도 대구 외곽의 칠곡군을 오가며 활동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칠곡과 대구, 상경 후 인천과 서울 사이를 오가며 그는 이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2년 전, 서울에서 내쫓기다시피 인천으로 온 나는 알 수 없는 우울감과 불안감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서울에 살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선택이 올바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었다.” - [관찰자로서의 숲] ‘무당벌레’ 라이너 노트 일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감각은 불안을 동반한다. 불안을 동력 삼아서라도 그는 무엇이든 되어야 했을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저서 ‘천개의 고원’에는 ‘~되기devenir’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사람이 아무리 ‘무당벌레 되기’를 시도한다고 해서 물리적으로 무당벌레가 될 수 없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유동은 ‘무당벌레-되기’를 통해 무당벌레도 사람도 아닌, 그 사이 무언가가 되어 노래한다. 화자는 사람의 언어로 말하지만 무당벌레처럼 높은 곳을 찾아 오르는 사람들에게, 늑대의 하울링 같은 메시지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되기’를 새로운 창조이자 생성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결코 견고하게 굳어진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중심보다는 변두리에서, 딱딱함을 허물고 끝없이 움직이며, 액체가 되고 기체로 퍼져나가는 유연함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관계성을 새로 발견하고, 무리를 형성하는 일이며, 그래서 결국은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는 일이 된다.


“난 부서지나 봐

나는 널 지우기 위해 살았는데

널 지우기 위해선 날 먼저

지워야 하나 봐” - ‘전유동’ <이끼> 가사 일부


 [관찰자로서의 숲]의 화자는 아무것도 찬미하지 않는다. 작가의 개인적 서사를 직접 전달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는 차라리 이끼가 되고, 무당벌레가 되고, 때론 뻐꾸기 흉내를 내며 자신을 지우고 부서진다. 그는 결국 음반 표지(혹은 책 표지)에 그려진 새인지, 이끼인지, 벌레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처럼 무엇도 아닌 추상의 상태가 되어 숲을 관조한다. 이때 드러나는 건 자연의 관점도 인간의 관점도 아닌, 그 사이 혹은 바깥 어딘가에 존재하게 된 무언가의 관점이다. 기존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바깥에 존재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규정되지 않은 관점에서 더 분명하게 보이는 삶이라는 ‘숲’의 모습을 그는 드러낸다.


 그날 지인이 밖으로 날려 보낸 무당벌레는 어디로 갔을까. 아마 지금도 자신만의 비행 지점을 찾아 계속 움직이고 있지 않을까. 5층 빌딩에서 처럼 헤매는 일도 있겠지만, 그 헤맴 자체도 사실 높은 곳으로 향하는 무당벌레에게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날 ‘나는 뭘까?’, ‘나는 어디 있는가?’라는 의문이 든다면 전유동의 [관찰자로서의 숲]을 추천한다. 이 음반이 분명 위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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