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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권형 Oct 15. 2020

실향민들의 재단

2020년 09월 28일 [인천In] 청년칼럼 기고


 이번 추석엔 국공립묘지 성묘도 ‘e하늘 서비스’라는 온라인 성묘 서비스로 진행해야 한다. 원래 가족 모임은 크게 신경 안 쓴지 오래이긴 하지만, 이번엔 아예 오지 말라는 눈치다. 공연을 못 한 지도 오래됐다. 원래 공연하는 것도 보는 것도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걸 체감한다.


 언젠가는 (이를테면 내년 말쯤) 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조금만 견디자는 생각으로 코로나 시기를 보내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지인들에게 반 농담 식으로 “정말 그런 날이 오긴 할까?” 같은 소릴 던지기도 한다. 농담이긴 한데, 그런데 정말 그런 날이 오지 않으면 어떡할 건가.


 “이곳 망배단은 인천지역 70만 이북 실향민들의 신성한 재단입니다. 우리들은 정든 고향 땅을 등지고 항시 그리움을 잊지 못하면서 추석절 같은 뜻깊은 날에는 조상님 산소에 성묘하지 못함을 슬피 여기며 묘소가 아닌 인천 망배단에서 제사를 올리면서 사무친 심정을 서로가 달래면서 생애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


 망배단은 피난 길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실향민들의 재단으로, 수봉공원에서도 산책하다 보면 ‘망배단’을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인용한 글은 수봉공원 망배단에 새겨진 글로, 이를 통해 실향민들의 심정을 조금은 들여다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코로나가 기승인 작금의 상황에서 추석을 맞이하며, 그리고 망배단을 통해 고향을 잃는다는 것, 장소를 잃는다는 것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 모두에겐 각자의 장소가 있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 내가 좋아하는 카페, 동료들과 만나는 공연장,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기억 따위가 뭉뚱그려지고 각자의 장소로 기억된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한 번쯤은 장소를 잃는 경험을 한다. 이제는 재개발된 옛날 주공아파트 단지, 지금은 없어진 서대문 형무소 건너편 옥바라지 골목, 담배 냄새나던 홍대 앞 지하 공연장.


 그리움은 기억하는 이들의 몫이다. 사실 코로나 창궐 이전부터, 우리는 장소를 잃는다는 상실감과,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 속에 살아왔는지 모른다. 너무 익숙해서 상실했다는 감각 자체에 무뎌져 있지는 않았었나. 어느 날 낯익은 건물이 무너져있는 풍경이 익숙해져 있고, 단골 가게가 어느 날 폐업하고, 좋아하던 여행지의 숲이 사라져도 그저 한번 아쉬워하고 말았던 건 아니었나.


 실향민들의 장소에 대한 상실감과 돌아갈 수 없다는 체념은 그리움이 되었고 그리움은 재단을 만들었다. 아마 그중 어떤 이들은 평생을 마음 한편에 언젠가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살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 당장 정치적 상황이 변화해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연 그곳이 그토록 그리던 기억 속 장소와 같을 수 있을까.


 이 시기가 지나가면 정말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예나 지금이나 장소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던 이들, 장소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던 나와 내 주변의 일상을 생각해본다. 전염병과 그에 대한 조치로 인한 작금의 피해와 상황들은 사실, 이전부터 존재했던 근본적인 사회적 문제들이 조금 더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천재지변으로 인해 많은 것이 변한 상황에서 맞이하는 추석 연휴이다. 모두가 장소의 상실을 겪고 있는 지금 이 시기가 사회적으로 장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아닐까. 전염병의 창궐은 진행 중이고, 지금 생각해보지 않으면 정말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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