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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권형 Apr 06. 2022

'아름답다'로 뭉뚱그려진 시간의 흔적들에 대해

‘이규호’의 <뭉뚱그리다>(2014년)

2022년 3월 25일 [인천In] '음악가 이권형의 인천인가요' 기고


 봄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계절이 돌아오면 잊었던 기억들도 함께 살아나곤 합니다. 기억은 언제나 은밀하게 숨어있다가 어떤 음악을 들을 때나 휘날리는 꽃잎을 볼 때면 언제든 다시 마음을 사로잡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주어진 현실에 충실해갈수록 한마디 설명을 위한 변명이 늘어갑니다. 효율적인 소통을 위한 논리와 이성이 점점 중요해지고, 막연함은 오해를 불러올 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연 오해 없는 소통이라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싶은 생각이 드는 날도 있죠.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깬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은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 아닙니다

- 슬픈 꿈을 꾸었느냐?

-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나레이션으로도 많이 알려진, 소설 <구운몽>의 구절입니다. 사라진 줄만 알았던 기억의 이미지들. 어느 날 불현듯 불려오는 장면을 마주할 때면, 사실 그것들이 무의식의 어딘가에서 버젓이 살아 떠돌고 있었다는 걸 깨닫곤 합니다. <구운몽>의 제자가 가을밤 마주한 꿈에 우는 것처럼, 아무리 복잡다단한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다 해도 인간의 의식과 언어론 그것을 붙들 수 없다는 사실도요. 모든 걸 의식할 수 없고, 그래서 망각하며 살아간다는 진실 앞에서 우리의 삶과 의식이 얼마나 협소한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겁니다.


 눈을 감으면 각자 떠오르는 장면이 있으실 겁니다.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요. 사라진 줄 알았던 흘러간 시간의 흔적들은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자꾸 되살아나는 꿈과 기억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는 항상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 이야기할 곡 <뭉뚱그리다>의 화자는 아무래도 “예쁜 기억만 남겨”, “아름다운 시절이다”라고 뭉뚱그리려는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게 막연했던 어린 시절엔 그런 게 지금보다는 훨씬 간단했던 것 같아요. 세상이 낯설고 막연한 만큼 모든 경험은 간단하게 뭉뚱그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걸 감히 ‘아름답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막연히 뭉뚱그려진 ‘아름답다’는 말의 푸르름이 지금 보면 “무엇 하나 되살리기에 늦은 무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죠.


 봄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다시 돌아온 계절 속에서 여러분들은 어떠한 기억을 마주하고 그 기억을 어떻게 뭉뚱그리고 계신가요. 후회보다는 다가올 많은 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간직할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계절은 반복되지만 사실 삶은 한 번뿐이고, “아름다운 시절이다”라는 뭉뚱그림 또한, 흘러간 시간을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열어내려는 삶에의 생동하는 의지이지 않을까 생각하면서요.


2014년 발매된, [SpadeOne] 앨범아트

“꽃잎 휘날리던 눈부신 언덕

흐릿한 얼굴 흩어 지나가는 이름 두 자에

안부를 묻고 예쁜 기억만 남겨 두었지


흘러간 시간

사실과는 달리 그저 우리를 다시 서로를

좋은 사람이란

막연함과 평온 속에 가두고


아름다운 시절이다 푸르른 날들이다 뭉뚱그리고

오, 바보 같은 시절이다

외길 하나 돌아가기 멀어진 숲속이다


흘러간 시간

사실과는 달리 그저 우리를 다시 서로를

한때 감정이란

막연함과 허공 속에 가두고


아름다운 시절이다 푸르른 날들이다 뭉뚱그리고

오, 바보 같은 시절이다

외길 하나 돌아가기 멀어진


아름다운 시절이다 푸르른 날들이다 뭉뚱그리고

오, 바보 같은 시절이다

무엇 하나 되살리기에 늦은 무덤이다”

 - ‘이규호’ <뭉뚱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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