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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i generis May 21. 2022

철학하길 잘했다

어떤 공부하세요?

나는 늦깎이 유학생이다.


한국에서는 어쩌다 공대에 진학해서 졸업했고,

시간이 지나 또 어쩌다 교육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제 이전 전공들은 꽤나 먼 거리에 있는 (정치-사회)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곳 뉴질랜드에서 새로운 한국인 분들을 만나게 되면 나는 언제나 같은 의례를 거쳐야 한다.

a: "무슨 일 하세요?"

b: "네 저는 유학생입니다."

a: "아. 그러시구나. 어떤 공부하세요?"

b: "네. 저는 정치-사회 철학을 전공합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반응은 언제나 한결같다.


"아... 어려운 공부를 하시는구나..."

이후 그분들은 더 이상 내가 하는 공부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묻지 않는다.


철학은 우리에게 대부분 그런 인상일 것이다.

어려운 것이라고 잘 포장해 주셨지만 사실 별 관심 없는, 내 삶과 별 상관없어 보이는 그런 인상 말이다.

나 역시 그랬다.

애초에 철학 전공자가 아니어서일까? 나는 철학이 우리에게 주는 인상을 잘 이해하고 있다.

한 번은 그런 경험도 있다.

철학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상대방은 나에게 진지하게 되물었다.

"철학이... 그... 저... 그거 전공하면 철학관 같은 거 하는 건가요?"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거슬러가서, 한국에서 석사 논문이 마무리될 시점에,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같은 전공으로 박사 과정에 진학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간편한 결정이었다.

당시 석사 지도 교수님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계셨다.

그런데 이 결정은 계속 망설여졌다.

내가 늘 의아하게 여겼었던 여러 문제들이 -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일상의, 사회의 여러 문제들 - 교육학을 통해 쉽게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상황은 박사 과정에 가서도 별반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교육'이 그런 문제들에 뭔가 답을 제공해주길 기대하며 교육학을 선택했었다.

그러나 교육학을 전공하면서 내 공부가 부족했던 탓인지, 나는 석사 과정 내내 답을 찾지 못한 것이다.


내가 왜 그런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따로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다만 그 당시 내가 늘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고단한 일상이지만, 고통을 덜 겪으면서, 우리 모두가 다 같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런 와중에 대학원에서 교양으로 접한 철학 수업에서의 당시 교수님 말씀이 계속 곱씹혔다.

그분께선 "외국에서 공부를 하다 보면 한국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의 유학생활은 시작되었다.

교수님 말씀처럼 외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한국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고 싶었다.

전공도 철학으로 정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앞뒤 딱딱 들어맞는 여러 철학자들의 논리가 왠지 나에게 문제시되었던 그 문제들에게 일부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 같았다.




유학 생활 첫 해, 두 번째 학기에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 School)를 접하게 되면서, 나도 비판 이론가(Critical Theorists)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 비판 이론(Critical Theory)을 동경하게 되었다.

당시 프랑크프루트 학파 1세대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마르쿠제, 프롬 등등, 그리고 같은 학파는 아니지만 이 학파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푸코가 내게 주었던 충격은 실로 대단하고 강렬했다.

그리고 이들은 기꺼이 나에게 한국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론적 도구를 제공해 주었다.




2016년부터 철학을 전공으로 공부를 시작해서 올해로 벌써 7년째다.

지금은 그때 프랑크프루트 학파 수업을 진행하셨던 그 교수님과 비판 이론가들 중 한 명인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의 정의론을 소재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석사 과정은 그의 인정 투쟁, 프레이저(Fraser)와의 논쟁 등을 중심으로 한 Portfolio였다).

(정치-사회) 철학과 그렇게 7년을 보내고 나니, 이제 나도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조금 생겼다.

그리고 우리 일상의, 사회 문제들이 (특히 정치-사회) 철학을 통해 풍부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을 더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그래서 얼마 전 생애 처음 블로그도 시작했고, 브런치 작가도 신청해서 승인을 받았다.

또 한국에 있는 나와 뜻을 함께한 몇 분과 관련 Youtube도 준비 중이다.



나는 철학 덕분에 "고단한 일상이지만, 고통을 덜 겪으면서, 우리 모두가 다 같이 행복할 수 있을" 그런 삶의 방식들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철학 덕분에 우리는 서로가 삶에서 얼마나 의존적인지, 왜 우리 서로는 함께 보완적이어야 하는지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철학 덕분에 다양한 분들과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도 풍성해졌다.

여러모로 철학하길 잘했다.




# 제가 철학을 통해 우리 삶을 말하고자 하는 시도의 첫 번째 작업이 바로 지금 연재 중인 호네트의 "자유의 권리(Freedom's Right)" 해설이고, 이제 막 한국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도구 한 가지를 소개하는 Chapter 근처까지 왔습니다.

브런치에서 제 글은 별 인기도 없고, 많이 읽히지도 않는데요. 그런 와중에 구독도 해 주시고, 하트도 눌러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별 인기가 없어도 저 앞으로 제   있는 만큼 꾸준히  나갈 예정입니다 (부디 저의 이런 시도가 브런치에 공해가 되지 않길 바라며...).

저는 철학이, 그런 인상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을, 혹은 인간을 우리가 상상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드러낼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방식은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앎을(knowledge) 정화시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 자연 과학이 우리 삶을 보다 편리하게 만들어 준다면, 철학은 우리  자체를 바꿔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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