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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i generis Jul 04. 2022

저는 상품이 되고 싶지 않아요 (Feat. 아도르노)

문화 산업에 의한 의식의 상품화


나는 인기 없는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블로그 대문에는 이렇게 적혀있으니, 그 이유는 너무나 자명해 보이긴 하다. “현실을 들여다보는 철학"

블로그에서 나는 주로 브런치에 연재 중인 글에 사적인 감정을 듬뿍 담아 게시한다.

감히 브런치에서는 밝힐 수 없었던 그런 내밀한 나의 사고가 블로그 게시글에는 추가되는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 공부를 위해 번역해 두었던 소논문도 게시하고, 가끔 뉴질랜드 일상도 공유한다.

혹시나 내가 가진 영어 능력이 다른 분들께 도움이 될까 싶어 관련된 게시판도 열어 두었지만, 아직 요청해 오시는 분들은 안 계시다.

#  글을 읽고 계신 감사한 분들 중에서도... 영어와 관련해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제가 아는 한에서 적극적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

하루에 한 번은 꼭 어떤 내용이든 게시하려고 애쓰지만, 내 블로그는 인기가 없다 (앞으로도 없을 예정인 것으로 보인다).

블로그를 운영하다 보면, 가끔 '서로 이웃' 신청을 받는다.

'서로 이웃' 신청은 구독자처럼 단순히 '나를 이웃으로 추가'하는 경우와는 다르다.

'서로 이웃'은 '너'를 이웃할 테니 '나'도 이웃해달라는 의미다. 주로 상업용 블로그를 운영하시는 분들이 많이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요청을 거의 거절하지 않는다.

의도 자체가 순수해 보이진 않아도, 어쨌든 나에게 베풀어준 호의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그렇게 '서로 이웃'을 맺은 한 분의 게시글은, 나를 딱히 정의 내릴 수 없는 묘한 감정에 빠져들게 하면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비판했던, 특히 아도르노가 이후 더욱 다듬었던 '문화 산업 (Culture Industry)'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했다.

그분의 게시글은 그랬다. '나의 성장일기'라는 제목으로, 오늘은 몇 명의 이웃과 팔로워가 생겨났는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웃과 팔로워 숫자가 그분에게 '나의 성장'인지는 내가 감히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다른 의미에서는, 내가 그분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다소 간 당혹스러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나는 상품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하면서 말이다.



이제는 이쪽 분야에서 어느새 고전이 되어버린 (그래서 인용하기에 다소 민망한), '계몽의 변증법 (Dialectic of Enlightnment)'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 Why humanity, instead of entering a truly human state, is sinking into a new kind of barbarism."

(Max Horkheimer and Theodor W. Adorno, Dialectic of Enlightenement, xiv).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면모로 향하기보다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에 빠졌는가"

(호르크하이머 and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xiv).



프랑크프루트 학파 1세대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2차 대전 중에 집필했던 이 저작은 이성과 계몽을 기반으로 발달해 온 지난 서구의 근대 역사가 결국엔 전쟁을 포함한 새로운 야만의 시대로 향하게 된 과정을 기술한다.

평생을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탐구하는데 헌신했던 두 저자는 총 다섯 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 책에서 실천적 삶에서 분리된 과학, 형식화된 도덕성, 문화 산업의 조작적인 본성, 반 유대주의에서 표현되는 인간의 편집증적 행위 구조 등을 다루는데, 이들 모두는 저자들이 보기에 계몽의 한계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들 중 내 블로그 이웃님의 글은 중 나에게 '문화 산업: 대중 기만으로서 계몽 (Culture Industry: Enlightenment as Mass Deception)'이라는 챕터를 떠올리게 한 것이다.


이 챕터에서 두 저자는 계몽의 한 측면으로써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 산업이, 그 도구적 논리가 인간의 사회적 삶 자체를 담당하도록 하면서, 스스로의 목적에서 이탈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들의 비판 대상이 '대중문화' 자체가 아니라 '관리되는 자본주의 사회 (adminstered capitalist societies)' 속에서 주체들이 문화를 소비하고 재생산하는 방식에 관한 '문화 산업'이라는 점이다.

# 즉 이들은 "문화가 상품 논리에 의해 의식적으로 조직되고 계획되는 점증하는 계기의 위험성" (노명우, 계몽의 변증법, 214)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보기에, 영화, 라디오, 그리고 인쇄 매체는 모두 대중의 심리적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통합된 산업의 일부이다.

외관상, 사람들은 이러한 문화 산업을 즐기고 향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문화 산업은 기존의 권력과 지배 구조를 공고히 하는 쪽으로 변모해 왔는데, 이는 결국 모든 대안적 사고들의 상호 간 의사소통을 방해한다.



그렇다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문화'에 '산업'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문화 자체에 대해 왜 이토록 암울한 분석을 내놓게 된 것일까?


기본적으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문화'라는 범주에 포섭되는 모든 대상들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업이 되고 경제가 되는 현상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입장에서 출발한다.

이들이 보기에, 문화라는 대상들은 외관상 예술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산업과 경제에 의존하고, 돈과 권력에 종속되어 있다. 이 대상들은 결국 이익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모든 예술 작품들이 단순 소비재로 전락하게 되고, 자본주의 합리성의 논리로 재구조화되는 실태를 한탄한다.

예술은 더 이상 인간 자율성의 (혹은 자기 진실성의) 표현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생산'이라는 경제적 구조의 상품화된 제품과 동의어가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렇게 문화는 산업이 되고 경제가 된다.



문화가 산업이 되고 경제가 된다는 것은 공급과 유통에 있어 독점을 야기하고, 이 독점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대중을 향한 정치적 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함축한다.

먼저 공급과 유통에 있어 독점이라는 것은 문화 산업이 경제 논리의 교환 법칙에 의해 특정한 대중의 욕구에 특화된 대량으로 생산된 상품들을 내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누구든 이 문화 산업의 표준화 기획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은 문화에서 배제되고, 반대로 여기에 순응하는 이들은 모두 문화 산업을 통해 자신들의 '정상성(normality)'을 확인한다.

대중은 스스로 문화를 즐기고 향유하며 현실을 경험하고, 그래서 각자의 삶을 구조화하고 조건화하는 통로로써 문화 산업에 참여한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이 같은 오도된 믿음은 자본주의의 문화 산업 지배자들이 던져놓은 덫에 이들이 완벽히 걸려들었음을 의미한다.

언뜻 보기에, 영화, 잡지, 방송, 대중음악 등은 다양한 소제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이들의 작동 원리는 동일하다.

이들은 모두 "의미 없는 클리세를(clieché)  재배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그 세부적인 내용들은 모두 상호 교환적으로 대체 가능한 것들이다.

여기서 차이는 단지 우리가 어떤 독창성도 없이, 결국엔 순응하고야 마는 가상의 마케팅 기술일 뿐인 것이다.

"문화 산업의 소비자는 자신의 입맛에 따라 다양한 문화 상품에 대한 선택권을 지닌 듯 보이지만, 문화 상품을 공급하는 문화 사업의 생산자는 선택의 범위를 결정하는 신과 같다" (노명우, 계몽의 변증법, 227).



여기서 발생하는 문화 산업의 정치적 효과는 자명하다.

문화의 상품화가 인간 의식의 상품화로 연결되면서, "문화 산업은 하자 없는 규격품을 만들 듯이 인간들을 재생산"한다 (노명우, 계몽의 변증법, 228).

예를 들어, 영화 도입부의 배경 음악은 대중들로 하여금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모두 유사한 방식에서 예측 가능하게 하면서, 이들의 비판적 사고나 반성적 사고 모두를 차단한다.

대중들은 이 배경 음악을 통해 특정한 방식에서 사전에 동일하게 기획되고 조작된 반응으로 통합된다.

대중은 더 이상 특수한 개인이 아닌, 마치 일종의 규격품과 같은 "가상의 인격체 (pseudo-individuality) "가 되는 것이다 (Max Horkheimer and Theodor W. Adorno, Dialectic of Enlightenement, 125).



이런 방식으로, 문화 산업은, 대중에게 이들의 욕망과 욕구가 무엇인지 묘사해 주면서, 그리고 기존의 사회 질서가 이들의 모든 욕망과 욕구를 충족해 줄 수 있다고 믿게 만들면서, 우리의 내적 생활 세계를 침식해 간다.

문화 산업 아래, 모든 이들의 태도, 관심, 지향성, 그리고 신념 등은 모두 동일해지고, 이 통일성에서 이탈하는 자들은 모두 사회 부적응자, 아웃사이더, 그리고 비정상으로 인식되고, 마치 별종처럼 취급된다.

# 잘 알려진 맛집, 명소에 가보지 못한 '나'는, 잘 알려진 '책 한 권' 읽지 않는 나는 스스로 삶을 잘못 살아가고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 (한국) 사회에서 '성공'은 모두 '경제적 부'로 환원된다. 그리고 이 경제적 부를 가진 이들의 말과 언행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 가치 이상의 특권과 권력을 누린다. '경제적 부' 아래에서 모든 삶의 목표는 하나로 통합된다.

우리는 모두 엘리트주의적인 자본의 지배자들에 수동적이고 종속적인 주체들로 변하게 되고, 문화와 관련된 자신들의 행위 자체에 무감각해지면서 (혹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모든 진중함이나 사고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포드주의적 생산 라인과 같은 방식에서 잉태된 문화 상품들은 우리의 정신세계 역시 생산 라인 속에 배치시킨다.

동일한 방식에서 기계적으로 생산된 문화 상품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대중들에 의해 소비되고, 표준화된 모든 문화 상품들은 제작자들과 소비자들 모두에게서 쉽게, 큰 노력 없이도 소화 가능한 상태로 제작된다.

가끔 그 감상에 있어 약간의 정신적 노력이 요구되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들 조차도 판매와 소비 촉진을 위한 첨가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문화 산업 아래 표준화된,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비판에서 멀어진 주체들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경향성이 한 점에 만나는 곳에 서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문화 산업은 개개인을 픽션으로 만들면서, 사회 속에서 새로운 검열을 만들어낸다.

"독재 국가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문화를 통제하고 검열한다. 독재국가의 문화 통제와 달리, 독점 문화 산업이 지배하고 있는 국가는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검열'의 기제는 여전히 작동한다. 독재국가에서 검열의 주체가 정부였다면, 문화 산업이 문화를 장악하고 있는 국가에서 검열관은 사적 영역으로 분산된다. 이윤을 창출할 수 없는 것은 문화 산업에 의해 통제된다. 예술적 완성도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유일한 고려 대상은 이윤 창출 가능성 여부이다" (노명우, 계몽의 변증법, 241).



"The general designation "culture" already contains, virtually, the process of identifying, cataloging, and classifying which imports culture into the realm of administration" (Max Horkheimer and Theodor W. Adorno, Dialectic of Enlightenement, 104).


"일반적인 '문화'라는 명칭은 사실상 관리 영역으로 반입되는 문화를 식별하고, 범주화하고, 분류하는 과정을 이미 포함한다" (호르크하이머 and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104).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검열의 시대에 살게 된 우리는 결국 나치와 다를 바 없게 된다.



The citizens whose lives are split between business and private life, their private life between ostentation and intimacy, their intimacy between the sullen community of marriage and the bitter solace of being entirely alone, at odds with themselves and with everyone, are virtually already Nazis, who are at once enthusiastic and fed up, or the city dwellers of today, who can image friendship only as "social contact" between the inwardly unconnected (Max Horkheimer and Theodor W. Adorno, Dialectic of Enlightenement, 125-126).


일과 사생활 사이에서 삶이 분리된, 허세와 친밀감 사이에서 사생활이 분리된, 결혼이라는 음산한 공동체와 완전히 혼자라는 쓰라린 위안 사이에서 친밀감이 분리된 시민들은 - 스스로와 그리고 모든 이들과 반목 상태에서 - 열광적이었다가도 곧 진저리가 나버리는, 즉 내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존재들 간의 '사회 계약'으로써만 우정을 상상할 수 있는 오늘날 도시 거주자들인 사실상 이미 나치들이다 (호르크하이머 and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125-126).





첫 출간 후 거의 한 세기가 지난 "계몽의 변증법"에서의 '문화 산업'에 대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진단과 분석을 우리는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후 이들의 진단과 분석은 여러 후학들의 혹독한 비판에 시달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분명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일상의 갈등과 권력이 생산적인 힘을 가질 수 있는 측면을 간과했고, 지배에 맞선 실천-도덕적 비판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지 못했으며, 그래서 결국 이들은 스스로 그렇게 꿈꿔왔던 '모든 억압에서의 해방'에 대한 관심을 잃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현재 한국 사회의 다양한 모습들, 특히 '대중문화'에 관해 약 한 세기 전에 거의 정확하게 분석해 냈다고 생각한다.


포털에 의해 양산되고 재생산되는 뉴스와 이슈.

자신들의 이익과 입장을 대변하는 소식들만 편집해 송출하는 종편.

거의 유사한 plot과 내용으로 소비자의 정상성을 부추기는 각종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대중음악.

'좋음'의 가치를 사전에 설정해두고, 이를 끊임없이 전파하라고 명령하는 각종 Social Media까지.

한국 사회의 문화는 모두 그렇게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정의했던 '문화 산업'의 범주 아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나를 포함하여, 나의 블로그 이웃님의 의식이 상품화되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문화의 상품화 속에 나 스스로를 일종의 픽션으로 만들기를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내 블로그 이웃님의 글을 통해 그런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문화 산업은 끊임없이 나의 성장을 이웃 수와 팔로워 수에 대입하라고 검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나는 이 검열 속에서 이미 하나의 상품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저기 어딘가 전시된 채, 소비자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상품화된 인간은 분명 (내가 연재 중인) 사회적 자유가 실현되는 영역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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