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가이 스탠딩 (Guy Standing), 그리고 프레카리아트
I. 들어가며
기본소득은 이번 대선에 나서는 이재명 후보의 대표 정책이자, 그의 정치적 브랜드로써 상당기간 회자되어 왔다. 동시에, 일정 부분 그의 정치적-도덕적 호불호를 따라, 기본소득은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인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에 관해 무엇이 그렇게 논쟁적일까? 사실, 전지구적으로 기본소득은 여러 경제학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대표적으로 자유주의 진영의 롤스주의자들, 그리고 사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몇몇 이론가들 사이에서 조차도 그 취지와 방법론에 관해 수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이들을 따라, 그리고 아마도 한국 내에서도 유사하게, 나는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입장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나 짧은 칼럼 형식을 빌린 글에서 그런 것처럼, 이 지점에서 단순화의 위험에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1) 보수 경제학자,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관점에서: 기본소득은 노동의 동기를 약화시키고, 시장의 자율적 메커니즘을 손상시킨다.
(2) 롤스주의적 관점에서: 분배는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한다. 부자에게도 똑같이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은 정의의 관점에서 적절하지 않다.
(3)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기본소득은 분배 이상의 재원 마련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재원을 충당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많은 제약이 따르고, 불가능에 더 가까울 것이다.
(4) 신자유주의적인 도덕성의 관점에서: 기본소득은 게으름을 조장하고, 도덕적 해이를 낳는다. 노동 생산성을 통한 사회 기여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5) 사회민주주의적 관점에서: 기본소득은 기존 사회보장을 대체하면서 노동자 연대를 약화시킬 수 있고, 이는 복지국가의 해체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이 각각의 항목을 따라 직간접적으로 반론을 제기해 온 여러 경제-사회 학자들, 그리고 사회-정치 철학자들이 있어 왔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포괄적으로, 이 진영에 속하는 이론가들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언급될 수 있다: 필리페 판 파레이스 (Philippe Van Parijs), 가이 스탠딩 (Guy Standing), 엘리자베스 앤더슨 (Elizabeth Anderson), 샘 보울스 (Samuel Bowles), 에릭 오린 라이트 (Erik Olin Wright), 마이클 왈쩌 (Michael Walzer), 낸시 프레이저 (Nancy Fraser), 그리고 토마 피케티 (Thomas Piketty) 등등.
상기 언급된 다섯 가지 항목, 그리고 이론가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고, 나는 이 글에서 '(4) 신자유주의적인 도덕관의 관점에서 기본소득이 게으름을 조장하고, 도덕적 해이를 낳는다'는 주장에 인상적인 반론을 제기하는 영국의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의 주요 입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또한 '(1) 보수 경제학자, 일부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듯, 기본소득은 노동의 동기를 약화시키고, 시장의 자율적 메커니즘을 손상시킨다'는 비판에도 일부 응답하고 있다). 나는 그의 저서 The Precariat: The New Dangerous Class (2011)가 이 문제와 관련된 논의에 몇몇 주요한 참조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이 저서가 국내에서 번역되어 출판되어 있는지 여부는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다. 이 점에 대해 역시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II. 프레카리아트(Precariat)의 등장과 확산, 그리고 기존 복지국가의 한계
나의 독해 속에서, 스탠딩이 기본소득을 단순한 분배 정책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에게, 기본소득은 21세기 신계급의 형성과 해체를 둘러싼 정치적 투쟁의 한 형태이고, 특히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의 등장과 확산은 그 중심에 있다. 일반적으로, 프레카리아트(Precariat)는 'precarious'와 'proletariat'를 더한, 즉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노동계급' 정도로 이해된다. 스탠딩은 새로운 자본주의의 계급 구조 전환을 묘사하기 위해 이 용어를 차용하는데, 그의 틀 속에서 프레카리아트는 단순한 노동조건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권리·미래 전망까지 박탈당한 계급으로 확대된다. 즉, 그는 단순히 불안정한 노동이 아니라, 사회적 시민권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에서 배제된 계층을 '프레카리아트' 속에서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i) 노동 유연성; (ii) 국제화(globalisation); (iii) 복지국가의 재편과 축소; (iv) 임금 정체 및 소득 구조의 재편; (v) 노조의 쇠퇴와 개인 계약화; (vi) 사회적 관계망의 붕괴; (vii) 테크놀로지와 ‘디지털 노동’의 확산 등은 스탠스가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위험 계급'으로서 프레카리아트 계급의 등장과 확산의 주요 원인들로 언급한 것들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Guy Standing, The Precariat: The New Dangerous Class, Bloomsbury Academic: New York, 2011, Chapter 2. "Why the Precariat Is Growing"을 참조하라). 스탠딩에 따르면, 프레카리아트는 정규직 노동, 복지국가, 장기적 경력 발전이라는 근대적 시민의 전제에서 밀려난 존재들이다. 불안정한 계약직, 파편화된 소득, 단절된 사회 안전망,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스스로를 자신이 속한 사회로부터 배제된 ‘준시민’(denizen)으로 여긴다. 이들은 고용 불안정뿐만 아니라, 정체성, 그리고 삶의 목적에 기반이 되는 직업적 자율성과 소속감 붕괴로부터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스탠딩이 프레카리아트를 묘사하는 몇몇 어구들을 보라: "minimal trust relationships with capital or the state" (Ibid., 8); "truncated status" (Ibid); "no shadow of the future" (Ibid., 12); "lives with anxiety" (Ibid., 20) and so on.
스탠딩은 프레카리아트가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프레카리아트는 단순히 '가난한 노동자' 혹은 '노동 계급'이 아니다. 과거 프롤레타리아는 직업적 공동체, 노동 기반의 안정성, 사회적 기억, 권리에 기반한 자격, 그리고 상향 이동에 대한 합리적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스탠딩은 프레타리아트가 이들 중 어떤 것도 갖지 못한 이들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부재는 이들을 전통적인 사회계약, 직업윤리, 복지 시스템, 계급 정체성에서 모두 배제된 새로운 위험계급으로 남아있게 한다. 따라서, 스탠딩은 과거 프롤레타리아들을 전제로 발전한 복지국가 모델이 프레카리아트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즉, 전통적인 복지국가는 안정된 고용과 사회적 보험, 노조를 기반으로 구축되었지만, 프레카리아트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현재의 복지 제도는 프레카리아트를 시민으로 포섭하지 못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스탠딩은 단순한 경제 구조의 전환을 넘어, 근대 국가의 시민 모델이 근본적으로 무너지고 있음을 진단한다. 그가 보기에, 시민이란 사회적 계약에 따라 권리를 갖는 존재지만, 프레카리아트는 더 이상 그 계약의 당사자로 간주되지 않는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복지의 조건화를 넘는 새로운 보장 체계, 즉 존재 자체를 인정받는 방식의 사회적 권리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Ibid., Chapter 1. "The Precariat," 그리고 Chapter 3. "Who Enters the Precariat?"를 참조하라).
III. 기본소득: 프레카리아트의 권리 지킴이로써 안전망
스탠딩은 기본소득이 이러한 프레카리아트의 권리를 보장하는 장치라고 주장한다. 이들이 노동시장 안팎 어디에서도 자신을 안정적으로 위치시킬 수 없는 존재들인 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로부터 신뢰받고 있다는 감각 자체가 결여된 사회 보장의 사각지대에 있는 집단인 한, 스탠딩에게 기본소득은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닌, 시민권의 복원이라는 시대적 요구인 것이다. 이 맥락에서, 스탠딩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를 염두에 둔 기존의 조건부 복지, 즉 workfare와 같이 일을 해야 복지를 받을 수 있다는 사회 보장은 프레카리아트는 더욱 감시의 대상으로 만들고, 비정상적 존재로 규정하며, 시민 사회로부터 분리시킨다. 그에게, 이러한 조건화는 법치주의의 파괴이자 인간 존엄에 대한 모욕이다.
"We are all ‘dependent’ on others, or to be precise we are ‘interdependent’... And providing fellow human beings with basic security should not be made conditional on some moralistically determined behaviour. If certain behaviour is unacceptable, it should be made a matter of law, subject to due process. Linking social protection to conditionality is to
bypass law, which is supposedly the same for all (Ibid., 175)."
> "우리 모두는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상호 의존적'이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기본 보장을 제공하는 일은 어떤 도덕적으로 규정된 행위를 조건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만일 특정 행위가 수용 불가능 하다면, 그것은 법의 문제로 다루어져야 하며, 정당한 절차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 사회적 보호를 조건부로 연결하는 것은 법을 우회하는 것이며, 이는 원칙적으로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스탠딩은 기본소득을 조건 없이 주어지는, 모든 시민의 사회적 배당으로 여긴다. 이것은 경제적 의미에서의 소득 이전을 넘어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존재를 인정받는 방식이다. 그에 따르면,
"Philosophically, a basic income may be thought of as a ‘social dividend’, a return on past investment. Those who attack it as giving something for nothing tend to be people who have been given a lot of something for nothing, often having inherited wealth, small or vast... Every affluent person in every society owes their good fortune largely to the efforts of their forebears and the efforts of the forebears of less affluent people. If everybody were granted a basic income with which to develop their capabilities, it would amount to a dividend from the endeavours and good luck of those who came before. The precariat has as much right to such a dividend as anybody else (Ibid., 173)."
> "철학적으로, 기본소득은 ‘사회적 배당’으로 간주될 수 있다 - 과거 (세대의) 투자에 대한 수익. 기본소득을 무언가를 하지 않고도 무언가를 받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은, 실상은 자신이야말로 별 노력 없이 많은 것을 받아온 경우가 많다 - 종종 크든 작든 유산을 상속받은 사람들처럼... 모든 사회의 부유한 이들은 자신들의 행운을 주로 그들 조상의 노력, 그리고 덜 부유한 이들의 조상이 기울인 노력에 빚지고 있다. 만일 모든 이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본소득을 부여받을 수 있다면, 이는 이전 세대의 노력과 행운에서 온 배당이 될 것이다. 프레카리아트는 어떤 누구든 그만큼 이러한 배당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갖는다."
스탠딩이 보기에, 이러한 권리는 과거의 기여에 기반한 것도, 미래의 생산성에 대한 약속도 아니다. 그 보다, 이 권리는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사회적 공동선', 혹은 '공유된 사회적 가치나 부(shared social values or wealth)'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누구도 그로부터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점에서, 기본소득은 프레카리아트를 ‘복지의 대상’이 아닌 ‘권리의 주체’로 복권시키는 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즉, 기본소득은 단순히 불행한 이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제도가 아닌, 프레카리아트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기획하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며, 공적 공간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게 만드는 기반인 것이다.
IV. 기본소득: 도덕적 해이라는 비판에 대한 반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본소득에 대한 비판들 중 하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돈을 준다면, 사람들은 노동을 피할 것이고, 결국 게을러질 것이다"라는, 즉 (신자유주의적인 도덕성의 관점에서) 시민들의 도덕적 해이와 관련된 주장이다. 스탠딩은 이 주장이 통계적으로 왜곡되어 있고, 정치적으로 비열한 프레임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대다수 사람들이 기본소득만으로 살아가는데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보다, "이들은 일하길 원하고, 자신의 물질적, 사회적 삶을 향상시킬 가능성에 기대를 가질 것이다. 소수의 '게으름'을 문제 삼아 이들을 몰아세우는 것은 우리의 미덕이 아닌, 나약함의 징후인 것이다 (They want to work and are excited by the possibility of improving their material and social living. To hound a tiny minority for their ‘laziness’ is a sign of our weakness, not our merit. Ibid., 174)." 스탠딩에게, 삶을 개선하려는 욕망이 인간의 보편적 동기인 한, 기본소득이 노동에 대한 동기를 저해하고, 결국 게으름에 익숙해질 것이라는 주장은 과도한 왜곡이다. 그는 2010년 런던 노숙인 대상의 조건 없는 현금 지원 실험을 이 사례로 언급한다. 몇 달 후, 대다수 노숙인들은 이 기본소득과 함께 자립에 성공했고, 이들에게 제공된 돈의 50배 이상이 납세자들의 비용 절감으로 돌아왔다. 이 사례는 (신자유주의적인 도덕성의 관점에서) 기본소득이 도덕적 해이가 아닌 '도덕적 회복'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스탠딩은 정책 설계와 관련한 근원적 물음을 던진다.
"What does it matter if 0.5 per cent of the people are lazy? Should policies be designed with the 0.5 per cent in mind or to give security and freedom to the 99.5 per cent, so that society has a more relaxed, less anxious life? (Ibid.)"
> "0.5 퍼센트의 사람들이 게으르다고 해서 그게 무슨 문제인가? 사회가 좀 더 안락하고 덜 불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책은 0.5 퍼센트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99.5 퍼센트에게 안정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설계되어야 하는가?"
정부 정책은 일부 예외를 통제하기 위해 설계되어야 할까? 아니면, 다수의 자유와 안정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조정되어야 할까? 스탠딩은 분명히 후자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 도덕적 해이를 방지한다는 명목 아래 수많은 이들을 복지 정책의 사각지대로 내모는 현 사회의 경향성에 대해 떠올려보라. 이것이 기본소득보다 더 큰 사회적 위험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V. 조건적 복지에서 자유의 복지로 - A Politics of Paradise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기존의 복지 제도는 노동 중심적 시민모델에 기초해 있었다. 복지를 위한 자격은 일정한 ‘조건’을 필요로 했고, 그 조건은 대부분 노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증명이었다. 스탠딩은 이것을 일종의 '조건적 복지'로 본다. 예를 들어, 실업 상태조차도 국가와의 일종의 계약관계로, 즉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 국가와 계약을 맺고 노동을 수행하게 하는 구조 (... "The intention is to make unemployment a
contractual arrangement – working for benefits with a contract with the state." Ibid., 143). 그에게, 이러한 구조는 '복지를 통해 시민을 길들이는 체계'이다. 반대로, "기본적 안전은 대부분의 보편적 인간의 욕구이고, 국가 정책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이다 (Basic security is an almost universal human need and a worthy goal for state policy)."
"Trying to make people ‘happy’ is a manipulative ruse, whereas providing an underpinning of security would create a necessary condition for people to be able to pursue their own conception of happiness. Basic economic security is also instrumentally beneficial. Insecurity produces stress, which diminishes the ability to concentrate and learn, particularly affecting those parts of the brain most associated with the working memory (Evans and Schamberg,
2009). So, to promote equal opportunity, we should aim to reduce differences in insecurity. More fundamentally, psychologists have shown that basically secure people are much more likely to be tolerant and altruistic. It is chronic socio-economic insecurity that is fanning neo-fascism in rich countries as they confront the delayed downward adjustment of living standards brought about by globalisation (Ibid., 175).
>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조작적인 기만에 가깝지만, 안정성을 뒷받침하는 조건을 제공하는 것은 사람들이 각자 나름의 행복 개념을 추구할 수 있는 필수적인 토대를 마련해 준다. 기본적인 경제적 안전은 수단적 차원에서도 유익하다. 불안정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이는 집중력과 학습 능력을 떨어뜨리며, 특히 작업 기억과 관련된 뇌 부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Evans & Schamberg, 2009). 따라서, 동등한 기회를 촉진하기 위해, 우리는 불안정성의 차이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보다 근본적으로, 심리학자들은 기본적인 안전을 보장받은 사람들이 훨씬 더 관용적이고 이타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지금 부유한 나라들에서 새로운 파시즘이 확산되는 주된 이유는, 세계화로 인한 생활 수준의 지연된 하향 조정에 직면하면서 발생한 만성적인 사회경제적 불안정 때문이다."
스탠딩은 기본소득을 단순한 생계보장이 아닌, 개개인 각자가 자신의 삶의 기획을 가능케 하고,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회복하는 수단으로 이해한다. 이처럼, 그에게, 기본소득은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보상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시민이 국가로부터 독립적으로 자기 삶을 설계할 수 있는 '자유의 기반'이다. 스탠딩 스스로가 “A Politics of Paradise”라고 명명한 틀, 즉 권위와 조건의 시대를 넘어서 자유와 존엄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정치는 기본소득과 함께한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Ibid., Chapter 7. "A Politics of Paradise"를 참조하라).
VI. Concluding Remarks
스탠딩이 개개인 주체성에 관한 상호주관적 구조를 철학적으로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 그리고 기본소득이 도덕적 해이가 아니라는 점을 뒷받침할 만한 실증적 사례들을 충분히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 등은 그의 저작에 대한 비판들로 제기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i) 새로운 계급의 등장과 확산으로써 프레카리아트에 관한 스탠딩의 해석; (ii) 이 계층이, 복지를 포함하여, 기존의 제도권 밖에 머물러 있다는 그의 진단; 그리고 (iii) 기본소득이 이들을 다시 제도권 안으로 포섭할 수 있는 정책이라는 그의 제안이 눈여겨볼 만한 요소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기본소득은 도덕적 해이를 낳는다는 주장에 맞서, 스탠딩을 참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몇 반론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누군가가 노동을 통해 사회 기여에 충실하지 않은 모습에 분노하면서,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상대적으로 관대한가?
왜 우리는 몇몇의 게으름을 막는 사회 정책을 강조하면서, 다수의 존엄과 생존의 조건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한가?
신자유주의적인 도덕성의 관점은 과거 산업화 시대의 노동 윤리를 전제로 하며, 오늘날 시민권에서 배제된 프레카리아트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만일 그렇다면,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자나 가족 돌봄으로 인해 사회적 노동 생산력이 저하된 이들의 도덕성을 이러한 노동 윤리만을 참조로 판단하는 것이 온당한가?
유산 상속이나 집안 배경과 같이, 개인의 능력이나 사회적 기여와 무관하게 특권을 누리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국가는 종종 온건한 세율과 제도적 관용을 제공해 왔고, 시민으로서 자격을 인정해 왔다. 반면, 국가는 (점차 개정되고 있긴 해도) 복지 제도와 함께 끊임없이 그 수혜자들에게 시민으로서 자격을 묻고, 노동 생산성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이들에게 그 자격을 부여하는 경향성을 보여왔다. 이러한 행태는 시민권을 조건부로 만드는 위험성을 드러낸다. 스탠딩이 주목한 것처럼, 우리는 프레카리아트와 같은 새로운 계층의 확산에 직면해 있다. 이 확산은 기존의 복지 제도에 대한 재고를 요구한다. 나는 기본소득이 새로운 복지 체계에 대한 상상에서 유망한 대안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분배 정책을 넘어, 기본소득은 새로운 계층의 시민권을 회복하고, 복지 체계를 조건이 아닌 보편적 권리의 틀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새로운 계층의 등장, 그리고 확산과 함께, 낡은 산업화 시대의 노동 윤리를 기반으로 한 신자유주의적인 도덕성 역시 폐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덕성은 본래 보편적 옳음과 관련되는 한, 이 새로운 계층은 기존의 옳음이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여러 측면에서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보편을 가장한 도덕성의 강요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 조건에 부합하는 도덕적 실천이 아닐까? 개인의 자율성을 포함하면서도, 인간 존엄에 대한 사실성은 망각하지 않은 채 서로를 향한 연대성을 강화하는 그러한 종류의 실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