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I. A: 둘 다 아님? B: 철학적으로... 글쎄?)
이 글은 제가 '빠띠'에 게시한 글을 옮겨온 것임을 밝힙니다. 출처: https://campaigns.do/discussions/2433.
논의에 앞서, 'Democracy'를 '민주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한가 여부는 토론이 필요해 보인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주의' (-lism)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정치 체계를 지나치게 이념과 결부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민주정' 정도의 번역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친숙함을 위해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대한민국의 정치 '체계'는 대의 민주주의 (Representative Deomcracy)를 표방합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투표를 통해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고, 이들에게 국가 운영의 권한을 위임해 왔습니다.
대한민국은 비교적 짧은 역사 속에서도 이 '제도'와 함께 민주주의를 지속, 발전, 재생산해 온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민주주의가 주로 이 체계 속 '작동 방식' 안에서만 이해된다면, 우리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제프리 C. 아이작(Jeffrey C. Isaac)이나 아담 프셰보르스키(Adam Przeworski)가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이해는 민주주의를 묘사하는데 필수적이긴 해도, 그 자체로 불충분한 접근인 것이지요.
이 협소한 이해 속에서, 우리는 그 핵심적인 '작동 원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따져 묻는 것보다, 민주주의를 '공정한 절차와 함께 여러 도전자들이 성찬을 놓고 벌이는 전쟁터' 정도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정치 문화에서 매 선거마다 등장하는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혹은 "저희가 꼭 승리할 수 있도록 여러분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같은 구호들은 이러한 이해를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이렇게 이해되도록 방치해 두어도 괜찮을까요?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민주주의를 '체계'의 관점에서만 소비한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까요?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소비와 이해는 최근 한국 정치에서 ‘젊음’과 ‘실력’을 결합하여, 민주주의를 technocratic 한 방식으로, 즉 전문성에 기반한 효율성이 정당성보다 우선시 된다는 논리를 따라 민주주의를 재해석하려는 시도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접근은 절차적 정당성과 이견의 조정이라는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를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축소해 버릴 위험을 내포합니다.
특히 특정 정치인의 담론에서 관찰되는 이러한 흐름은 '실력'이 자유와 평등을 침묵시키는 새로운 형식의 권위주의로 발현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다음 기회로 미뤄두기로 하고, 저는 앞으로 현대 정치 철학 속 민주주의 원리의 두 가지 주요한 이해 방식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vs. '급진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의 근원적 원리를 두고 벌이는 두 진영 간 철학적 담론을 매우 압축적으로 살펴보면서, 저는 민주주의에 관한 우리의 이해 확장과 추가적 논의를 목표로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민주주의에 관한 이 두 진영을 (간략하게라도) 개괄하는 일은 왜 중요할까요?
이에 앞서, 보다 근본적인 질문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민주주의는 본래 합의와 갈등이 본질 아니야? 이 둘을 왜 구분하는 건데? 왜 (정치) 철학자들은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하면서, 한쪽 입장을 고집해서 논의를 펼쳐가는 거지? 민주주의가 갈등과 합의 모두를 포함한다는 입장이 왜 문제적이지? 등등"
언뜻 보기에, "민주주의는 갈등과 합의를 모두 포함한다"라는 주장은 자명해 보입니다.
민주적 절차 속 현실에서 선거판은 치열한 경쟁이지만 (갈등), 우리는 보통 투표 결과를 받아들입니다 (합의). 민주주의의 의미론적 원리의 관점에서, 광장에서 서로 상반된 의견을 가진 집단이 벌이는 시위는 기존 질서를 의문에 붙이고자 하는 시도이지만 (갈등), 우리는 시위 자체를 민주적인 헌법 속에서 보장하고 있습니다 (합의).
하지만, "민주주의는 갈등과 합의를 모두 포함한다"는 테제는 사실 철학적으로 상당한 난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둘을 이론적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강력한 시도 역시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노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아이리스 M. 영(Iris M. Young), 존 드라이젝(John Dryzek), 그리고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의 시도처럼 말이지요.
그럼에도, 이러한 이론가들 속에서 여전히 핵심 갈등은 존재합니다.
이들은 또한, 큰 틀 안에서, "한 전통 안에서 다른 전통을, 즉, 합의 속에서 갈등을, 반대로 갈등 속에서 합의를 숙고해 보고자 했다"거나 "이 두 전통 간 경계를 재조정하려 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핵심 구성 원리를 합의와 갈등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다양한 각도에서 우리는 이 테제가 처한 난제들을 재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논의의 초점을 위해, 저는 이 글에서 한 가지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속에는 갈등도 있고 합의도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칫 "민주주의는 뭐든 될 수 있다"는 말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념을 한 바구니 속에 넣고 보니, "민주주의의 근원적 원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점차 모호해지는 것이지요.
이는 정반대의 답을 동시에 적어 제출한 시험지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것과 유사합니다.
최근 국내 사정과 함께 이 사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아마도,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공론들의 타당성에 관해 한 번쯤은 숙고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윤석열 탄핵 선고로 인해 내란은 어느 정도 진정의 국면을 맞이한 거 같은데... 그럼 앞으로 우리는 어떡해야 하지? 내란을 옹호했던 저 정당과 지지자들을 협치의 대상으로 여겨야 하는 거야? 그게 민주주의야?" 이 질문은 합의가 언제 가능한지에 대한 우리의 참조점에 의구심을 제기합니다.
"Again Yoon! 윤석열 대통령의 억울함을 풀고, 다시 그가 정치 전면에 나서도록 돕자. 그게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로서 역할이다!" 이 주장은 갈등이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국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분별력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많은 이론들이 그런 것처럼, 철학 역시 우리 일상의 '추상성(the abstract)'을 '구체성(the concrete)'으로 전환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예를 들어, '정의(Justice)'라는 개념을 놓고 여러 이론가들은 (현대에서는 주로 '옳음'[the right']과 '좋음'[the good]의 관점에서) 이를 각자의 방식대로 구체화해 왔습니다.
자유주의자들과 공동체주의자들의 논쟁은 여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고, 좀 더 최근에는 이 둘 사이의 멋진 경계선을 긋고자 하는 시도도 존재합니다.
(이전 글에서 소개했던 것처럼) '자유'라는 개념은 역사와 함께 그 의미가 풍성해졌습니다.
서구 근대 속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인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자율성(Autonomy)에 관한 논의, 현대에 이르러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와 적극적 자유(Positive Liberty)에 관한 담론, 그리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의 사회적 자유(Social Freedom) 개념 제안은 모두 이 영역에서 탁월한 진보를 보여줍니다.
이와 유사한 방식에서, (정치) 철학자들은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작동 원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명하고자 해 왔습니다.
즉, 이들은 얽혀있는 민주주의와 관련된 개념들을 더욱 날카롭게 재단함으로써, 이 개념들이 좀 더 분명해지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개념적 선명성뿐만 아니라, 정치적 실천의 방향성을 제공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계하며, 실천해야 하는지에 관한 철학적 선택지를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점에서, 철학은 복잡한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정돈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이는 매우 헤겔적인[Hegelian] 방식으로써, 철학에게 세계를 바꾸는 일이 아닌, 세계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역할을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칼 맑스[Karl Marx]는 이러한 접근을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그는 철학이 변혁을 위한 실천적 힘이 되길 바랬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철학자들의 입장을 검토하는 일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각자의 방식대로 해답을 찾아나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 속에서 모두를 포용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판단 기준으로 정당한 주장과 정당하지 않은, 혹은 몰상식적인 주장을 구분해야 하는가?"
"이 구분은 합리성(Rationality)에 기반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자체로 추상적인 합리성을 너머 우리 일상의 제도화된 관습(Institutionalised Practice)에 기반해야 하는가?"
"누군가 합의를 이유로 이견을 소홀히 한다면, 이는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장치로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
"갈등과 합의 모두가 민주주의의 주요한 작동 원리라면, 당장 우리는 실천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등.
지금까지 저의 시도가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를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한 설득력 있는 해설이 되었길 희망하면서, 이어지는 회차들을 통해 합의와 갈등을 둘러싼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두 진영 '심의 민주주의'와 '급진 민주주의'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합의적 이상'을 강조하는 심의 민주주의와 '갈등의 지속 가능성'을 강조하는 급진 민주주의.
현대 민주주의 의미의 지평에서 이 두 진영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들의 논의를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무엇을 더해 볼 수 있을까요? 다음 회차에서 논의를 이어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