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II. 하버마스 에디션 - 심의 민주주의
이 글은 제가 '빠띠'에 게시한 글을 옮겨온 것임을 밝힙니다. 출처: https://campaigns.do/discussions/2500.
지난 글에서, 저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주로 '체계'의 관점에서만 이해할 경우 기저의 근원적 작동 원리를 놓치게 될 위험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 원리를 탐구하기 위해, 저는 최근 수 십 년 간 학계에서 흥미로운 논쟁을 벌이고 있는 두 가지 민주주의 모델 - 심의 민주주의와 급진 민주주의 - 에 주목해 볼 것을 제안했습니다. 저는 또한 본격적으로 이 모델들을 탐구하기에 앞서, 이들을 특징화 하는 '합의와 갈등'이 민주주의 속에서 모호하게 이해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 중 한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난 글을 참조해 주세요: 민주주의는 합의인가, 갈등인가? Part I https://brunch.co.kr/@2h4jus/50).
예고한 대로, 저는 이어지는 글에서 심의 민주주의와 급진 민주주의를 간략하게 검토하고자 합니다. 이는 결국 "민주주의는 무엇을 통해 규범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라는 정치 철학의 핵심 질문에 접근하기 위한 이론적 탐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I. 누가 심의 민주주의와 급진 민주주의를 대표하는가?
폭넓게 말해서, 존 롤스(John Rawls)와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민주주의 이론은 심의적 모델을 지향합니다. 이후 롤스적 접근을 따라 조슈아 코헨(Joshua Cohen), 그리고 하버마스적 접근을 차용한 제임스 보흐만(James Bohman)은 각자의 방식대로 심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들은,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다음 테제에 동의할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정당성은 다수결 원칙이 아닌, 공론장 속 시민들의 논의와 합의를 통해 형성되어야 한다." 반면, 샹탈 무페(Chantal Mouffe),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 그리고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급진 민주주의를 대표합니다. 이들 중, 랑시에르는 무페와 라클라우와는 다른 철학적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갈등과 이견의 정치이며, 그 자체로 기존 질서의 균열과 탈위계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들과 일정한 문제의식을 공유합니다. 다만, 우리는 랑시에르가 '급진 민주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회피해 왔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급진 민주주의는 무페-라클라우 계열의 이론을 중심으로 구성된 틀이고, 랑시에르는 이 틀에서 다소 간 이탈하며 자신만의 논의를 전개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를 특정한 체제가 아닌 언제나 체제의 외부에서 돌출하는 사건으로 이해하고, 제도화된 합의가 아닌 갈등과 균열의 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랑시에르는 이들과 느슨한 연관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 이론가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습니다. 대신, 이 영역에서 하버마스의 영향력, 그리고 좀 더 최근 랑시에르의 주목할 만한 성취를 고려하여, 이 둘을 통해 심의 민주주의와 급진 민주주의의 속에서 합의와 갈등이 형식화되는 방식을 간략히 서술해 보고자 합니다. 다른 이론가들이 이 둘에 비해 덜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해 두면서, 이번 회차에서는 심의 민주주의에 초점을 맞춰 보겠습니다.
II. 하버마스의 심의 민주주의 모델 - 민주주의 담론 이론 (Discourse Theory of Democracy)
하버마스는 민주주의가 우리 언어와 상호작용 속에서 실현되는 합리성과 정당성의 구조를 바탕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맥락에서 그의 민주주의 이론은, 넓은 의미로, 담론을 통한 참여자들 간 합의(consensus)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묻고, 그 가능 조건들을 탐색하며, 나아가 이러한 조건들이 민주적 제도 안에서 어떻게 정당성의 근거로 기능할 수 있는지 검토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목표를 따라, 하버마스의 심의 민주주의는 몇몇 키워드로 특징될 수 있습니다: 의사소통 행위, 민주적 공론장과 시민 사회, 담론 윤리 속 보편화 원칙, 그리고 사회 통합 매개체로써의 법.
한 철학자의 과업을 단 몇 문단으로 요약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저는 이 키워드들을 포괄할 수 있는 하버마스 민주주의 모델의 시작점, 혹은 규범적 토대인 '의사소통 행위이론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의 몇몇 주요한 요소들을 조망해 보고자 합니다. 이 요소들은 우리가 그의 심의 민주주의 외관을 그려보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외관은 우리에게 '합의'가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방식에 관한 이해를 제공할 것입니다 (하버마스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제가 현재 브런치 스토리에서 연재 중인 그의 저서 사실성과 타당성 [Between Facts and Norms] 해설이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이 해설에서 저는 하버마스의 심의 민주주의 이론에 관한 보다 상세한 서술을 목표로 합니다. 참조: https://brunch.co.kr/brunchbook/betweenfnn).
III. 의사소통 행위이론 - 하버마스 민주주의 모델의 규범적 토대
하버마스는 일찍이 우리가 상호 간 이해에 도달하는 방식, 그리고 필요한 경우 행위에 대한 동의와 조정 방식이 '의사소통 행위(communicative action)'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는 의사소통 행위를 발화자의 발어적 행위(illocutionary act)와 이 행위 속에 내포한 타당성 주장들(validity claims)에 대한 청자의 합리적 평가로 (예/아니요) 이해합니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발화자와 청자 간 '강요되지 않은' 동의가 수립될 때, 발어적 행위의 성공은 언급된 내용에 관한 청자의 합리적으로 동기화된 승인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사소통 행위에 관해 하버마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이 행위 속 타당성 주장들을 한 예시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위 해설을 따라, 발화자인 A와 청자인 B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의사소통 행위가 수립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A: "오늘 퇴근하고 술 한잔 어때요?"
B: "좋아요, 딱 필요했어요."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처럼 B가 술자리를 위해 A를 만나길 원한다고 했을 때, B는 다음과 같은 가정 위에서 A의 제안에 동의하도록 스스로를 합리적으로 동기화 한 셈이 됩니다. 반대로, A는 언제나 자신의 발화가 다음과 같은 '타당성 주장들'을 포함한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i) 진실성 주장 (Sincerity Claim): B는 A가 정말로 퇴근 후 함께 술자리를 하고 싶다는 진정한 의도를 가지고 말하고 있다고 전제합니다.
(ii) 사실성 주장 (Truth Claim): A, B 모두 퇴근 후 물리적으로 만날 수 있는 상황이어야 합니다.
(iii) 옳음 주장 (Rightness Claim): 퇴근 후에 만남은 A와 B사이에 법적으로 적법한, 혹은 규범적으로 가능한 활동입니다.
하버마스의 형식 속에서 핵심은, 의사소통 행위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너머 '상호 간 합의에 이르는 실천'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몇 가지 중요한 함의들을 수반합니다.
첫째, 합의는 '강요 없는' 정당화 과정을 통해 가능해야 합니다.
둘째, 발화자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정당한 보증(warranty)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이러한 실천은 담론(discourse) 속 '의사소통적 합리성(communicative rationality)'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함의들은 하버마스 이론의 몇몇 중요한 측면들을 구성합니다. 이 구성 속에서, 하버마스는 발화자가 제안한 내용의 수용 가능성이 이 제안에 실제 가능한 이유를 제공하면서 청자의 의구심을 완화시킬 수 있는 화자의 역량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 발화자는 자신의 발어적 행위의 구속력을… 자신이 제공하는 보증의 조정 효과에 빚지고 있다: 즉, 필요하다면, 자신의 발화 행위와 함께 제기된 타당성 주장을 보완하는 것. "
... a speaker owes the binding force of his illocutionary act... to the coordinating effect of the warranty that he offers: namely to redeem, if necessary, the validity claim raised with his speech act" (Jürgen Habermas,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vol. 1, 1987, 302).
여기서 앞의 사례로 돌아가 보면,
만일 A의 제안에 대해 B가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면 - (i) 진실성 주장: '괜히 떠 보는 것 같은데?' / (ii) 사실성 주장: '오늘 회사에서 회식 있다고 했는데?' / (iii) 옳음 주장: '기혼자와 단 둘이 술자리를 하면서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은데?'와 같이 - "술 한잔 괜찮긴 한데, 무슨 일 있으세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A는 자신의 제안에 추가적인 설명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타당성 주장을 보완(redeem)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요. 그냥 요즘 좀 회사가 어수선했잖아요. 같이 회포나 좀 풀죠." 이는 담론의 추가적 정당화의 실천이 발생하는 순간입니다. 이 실천은 상호 간 동의에 대한 B의 동기화에 따라 반복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합의에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로 부과된 '내적 제약(the internal constraints)'은 발화자와 청자가 서로에게 갖는 '합리적 책무(rational accountability)'의 형태를 띠게 됩니다. 따라서, 청자는 단순히 발화자의 주장을 수용하는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그 보다, 청자는 발화자의 주장들을 합리적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할 권리와 역량을 지닌 동등한 상호 작용자가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상호 간 주장들을 비판하고 정당화하고자 하는 실천은 (즉, 담론-discourse) 합리성의 독특한 형태를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버마스가 '의사소통적'이라고 명명한 그 합리성입니다.
IV. 의사소통적 합리성 (Communicative Rationality)
간단히 언급해 보면,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하버마스의 전임자들이 -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어 W. 아도르노(Max Horkheimer and Theodor W. Adorno) - 계몽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에서 인간 이성을 비판할 때 차용했던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과 대비되는 (하버마스만의) 고유한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근대의 산물인 인간의 이성이 수단-목적의 효율성에 초점을 맞추면서 인간 주체성을 스스로 억압하고 결국 전체주의와 파시즘으로 향하는 과정을 '도구적 이성', 혹은 '도구적 합리성' 개념과 함께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합리성'에 대한 희망을 유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보다, 그는 합리성의 의사소통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인간 이성의 회복 가능성을 모색해 보았던 것이지요. 합리성에 있어 이 '의사소통적 전환(communicative turn)'을 통해, 하버마스는 왜곡되지 않은 담화 공간에서 인간의 이성이 여전히 해방적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견해는 인간 이성을 도구적 합리성의 귀결로 보는 자신의 전임자들과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 뚜렷이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하버마스에게, 의사소통 행위가 성립하려면, 담론 참여자들은 서로를 합리적으로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존재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 (의사소통적) 합리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도 없고 오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합리성의 부재는 우리를 다시 야생의 상태로 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상호 간 이해를 지향하는 의사소통적 실천은 대화 상대자들이 합리적 발화와 발화의 합리적 평가를 위한 각자의 역량에 있어 서로를 동등하게 여기는, 서로를 향한 상호 인정의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는 의사소통적 행위의 실천이 “항상 이미 모든 도덕적 사고들이 철학적 윤리만큼이나 일상적 삶 주변을 선회하는 상호 호혜성과 상호 인정의 관계들을 전제로 한다 (always already presuppose those very relationships of reciprocity and mutual recognition around which all moral ideas revovle in everyday life no less than in philosophical ethics, Habermas, Moral Consciousness and Communicative Action, 1990, 130)"는 하버마스 주장의 토대입니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형식 속에서, 우리 일상의 '의사소통 행위'는 서로를 향한 합리적 책무뿐만 아니라, 서로의 상호 호혜성(reciprocity), 그리고 상호 인정(mutual recognition)의 태도를 요구합니다. 반대로, 이 태도는 언제든 도전받을 수(defeasible) 있는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만일 A의 발화 내용의 적법성에 B가 의구심을 제기한다면, A는 스스로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자신의 타당성 주장들을 추가적으로 정당화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일 A가 이 정당화를 거부한다면, 그/그녀는 수행적 모순(performative contradiction)에 빠지게 됩니다. A는 동시에 (i) 자신의 발화에 있어 규범적 타당성의 가정, (ii) 지시의 합리적 수용 가능성이 의존하는 정당화의 실천 모두를 거부하기 때문이지요.
V. 생활 세계와 체계 (System and Lifeworld)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행위이론(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vol. 1 and 2)에서, 우리가 상호 이해에 도달하고, 이 이해를 바탕으로 조정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행위 구조를 탐색합니다. 물론 하버마스는 이 구조가 이상적인 조건 아래서만 작동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사소통 행위를 위해 요구되는 합리적 책무, 상호 호혜성, 그리고 상호 인정의 규범들이 종종 발화의 맥락에서 약화되고 거부된다는 점, 그리고 강제되지 않은 방식에서 의사소통적 행위를 추구할 자유가 보편적으로 향유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를 들어, 모두에게 동등한 발언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 발화의 수용 가능성이 제재의 위협에 의해 제한되는 사회, 혹은 말하기 자체가 위축되는 조건 하에서는, 의사소통 행위를 위한 조건들이 - 청자의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화자의 타당성 주장에 대한 정당화 의무, 그리고 상호 대화자 간 신뢰 등 - 구조적으로 차단됩니다.
그럼에도,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관한 그의 개념을 따라) 의사소통 행위를 위해 요구되는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사회 질서 자체가 지속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지속해서 강조합니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상호 행위를 조정하고 공동의 삶을 구성하고자 한다면, 의사소통 행위와 관련된 정당화 관습을 체계적으로 거부할 어떤 방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정당성이 요구될 때 발화자가 정당화를 제공하는 일을 거부한다면, 그 주장들의 적법성 - 따라서 수용 가능성 - 에 대한 상호 간 인정은 더 이상 가정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 경우 청자는 발화자의 주장을 더 이상 수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버마스에게, 우리가 상호 간 언어적 상호작용을 지속하는 이유는 언제든 이 행위가 (발화자가 제공하는) 추가적인 정당한 보증(warranty)에 의해 뒷받침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사회 질서가 공유된 확신 위에 그 토대를 유지해야 한다면, 우리는 이 믿음과 함께 의사소통 행위를 피할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하버마스는 우리가 공유된 확신을 형성하는 데 있어 의사소통 행위와 논증적 담론이 수행하는 역할을 대체할 어떤 수단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잘 알려진(?) 하버마스의 체계(System)와 생활 세계(Lifeworld) 간 구분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생활 세계는 언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간의 발화에 있어 이해를 가능케 하는 깊이 자리한 배경, 이해, 문화적 규범, 그리고 상호 기대들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말을 이해하고 특별한 설명 없이도 적절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생활 세계를 공유한 덕분입니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우리는 이 생활 세계 덕분에 의사소통 행위에 내재한 불일치(disagreement)의 위협을 관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일종의 거대한 배경적 합의로써, 생활 세계는 발화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타당성 주장을 발전시키기 위한 토대로써 역할을 하는 공유된 사전 이해, 즉 깊이 자리한 배경 지식을 제공합니다. 반대로, 언어적 의사소통 속 불일치의 위협은 이 생활 세계 속에서, 즉 일상적인 실천 속에서 "흡수되고, 조정되며, 억제되는" (Habermas, On the Pragmatics of Communication, 2001, 237) 것이지요.
그러나, 하버마스는 이 생활 세계가 결코 고정된 자원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하버마스는 근대화 과정에서 등장한 체계(System), 즉 시장 경제, 관료제, 법 제도 등과 같은 기능적 메커니즘들이 생활 세계를 점차 침식해 간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체계는 화폐와 권력과 같은 비의사소통적 매개체에 의해 작동되며, 효율성과 통제 논리와 함께 우리의 언어적 상호 작용에 요구되는 조건들 - 정당화, 상호 간 이해, 규범적 책무 등을 점차 무력화시키는 경향성을 보여왔던 것이지요. 이는 '생활세계의 식민화(the colonisation of the Lifeworld)'라는 용어 아래 하버마스의 상세한 현대 사회 진단으로 이어집니다.
VI. 심의 민주주의 - 민주적 공론장과 시민 사회, 담론 윤리, 그리고 사회통합 매개체로써의 법
이 비판적 진단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살펴본 것처럼, 그에게, 합의는 언제나 불일치의 가능성 위에서만 의미를 갖습니다. 언제든 발화가 거부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합의의 진정한 조건인 것이지요. 따라서, 하버마스는 우리가 발화자의 주장에 언제든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하고, 발화자는 그 요청에 정당하게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합니다. 제 방식으로 이 지점을 해석해 본다면,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일상 속 '의사소통 행위'의 이 정당화적 관습이 거부되는 범주를 따라, 합리적 책무, 상호 호혜성, 그리고 상호 인정에 기반한 사회 질서 (나아가 사회 통합)의 가능성이 거부될 것이다." 따라서 의사소통 행위 속 합의는 단순히 의견 일치의 결과가 아닙니다. 합의는 언제든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청자의 자유와, '아니요'에 응답할 수 있는 발화자의 태도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버마스는 지금까지 살펴본 '의사소통 행위'라는 출발점 위에서 도덕성, 법, 그리고 민주주의 이론의 규범적 토대를 재조명하기 위한 광범위한 기획에 착수합니다. 이 틀 속에서, 하버마스는 자신의 심의 민주주의 이론을 통해 생활 세계의 식민화로 침식된, 그리고 탈중심화된 사회로 분화된 “정치적 공론장 내 의견, 의사 형성의 논증적 특징(discursive character of opinion- and will-formation in the political public sphere, Habermas, Between Facts and Norms, 1996, 151)”을 소생시키고자 합니다. 그는 이 이론 속에서 민주적 공론장과 시민 사회, 담론 윤리,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회통합 매개체로써의 법'에 관해 상세히 논의합니다. 하버마스가
약한 공론장(사적 결사체에서 대중 매체까지 일종의 하위문화적 공중의 개방적이고 융합적인 네트워크)과 강한 공론장(의회와 같이 절차적으로 규제되고 제도화된 공론장)을 구분하면서, 둘 간의 민주적인 권력 순환을 강조했던 장면,
공론장의 의사소통적 구조들을 생활 세계의 사회적 구성에 고정시키는 비정부적이고 비경제적인 관계들과 자발적 결사체로 구성된 시민 사회에 관한 상세한 서술을 제공했던 부분,
도덕적 판단 능력의 발전을 묘사할 때 규범적 참조점으로서 담론 윤리에 관한 해설을 제공할 때, 그리고
그의 심의 민주주의 이론의 백미로써, 사적 자율성 실현과 공적 자율성 실현의 상호 기원성(co-originality)을 가능케 하는, 따라서 우리의 인권과 국민 주권이 동시에 발현된, 즉 우리가 법의 수신인인 동시에 법의 저자가 될 수 있는 (사회 통합의 역할을 담당하는) 근대법에 관한 해설을 제공했을 때 (여기서 하버마스의 공적 자율성에 관한 해설은, 서로 다른 전제에도 불구하고, 이전글에서 소개했던 롤스의 공적 이성 개념과 특정한 지점에서 교차하게 됩니다),
이들은 모두 '의사소통 행위' 주변을 선회합니다. 하버마스는 우리를 말하는 존재(speaking beings)로 간주하면서, 우리가 서로에게 타당성 주장들을 제시할 수 있고, 그 이유를 경청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그의 심의 민주주의적 구상은 단순히 제도적 틀을 설계하는 문제가 아닌, 법과 제도의 정당성이 어떻게 우리 삶의 실천 속에서 생성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하버마스에게 민주주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과 함께, 서로를 향한 의무와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 우리들이 함께 구성해 가는 삶의 형식인 것이지요. 결국, 하버마스의 틀 속에서, 우리가 ‘합의에 이른다’는 것은 단순한 의견 일치를 지칭하지 않습니다. 그 보다, 합의는 서로를 동등한 말할 수 있는 존재로 인정할 때 발생하는 그 관계적 책무성 속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버마스의 심의 민주주의는 의사소통 행위 속 그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정당성이 평가되어야 할 '열린 결말(open-ended)'의 과정인 셈입니다.
VII. Concluding Remarks
지금까지 저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이론'의 몇몇 주요한 요소들, 그리고 이 규범적 토대와 함께 그가 그리는 심의 민주주의를 간략히 돌아보았습니다. "이 내용을 국내 사정에 어떻게 적용해 볼 수 있을까?"에 대한 검토는 Part IV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몇 가지 질문들과 함께 상기 내용들을 요약해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하버마스에 대한 비판적 평가들은 예외로 하겠습니다 (다음 회차에 살펴볼 랑시에르는 하버마스 비판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버마스를 따라,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의사소통 행위 속 '합의의 의미'와 '합의가 동반하는 것들'을 고려해 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과 함께 우리가 처한 현실을 함께 재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일상에서 정치-사회적 문제까지, 우리는 발화 행위 속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타당성 주장들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여 왔는가? 반대로, 우리는 의사소통 파트너의 발화 행위 속에서 단순한 주장과 타당성 주장을 얼마나 잘 구획할 수 있는가?
2. 그/그녀의 (정당 정치인, 평론가, 인플루언서, 언론인, 그리고 나 등등) 발화 행위는 합의를 지향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기반해 있는가, 아니면 착취나 지배를 목표로 하는 '도구적 합리성'에 기반해 있는가? 조금 얕은 의미로, 여기서 착취나 지배는 의사소통 속에서 (i) 상대방을 하대하는 행위, (ii) 교묘한 언사와 함께 농담을 구실로 상대를 지속적으로 비하하는 행위, 그리고 (iii) 최근 흔히 언급되는 다양한 목적의 가스라이팅 등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3. 의사소통 행위 속에서, 누가 반복적으로 수행적 모순을 저지르고 있는가? 즉, 누군가는 자신의 타당성 주장들에 관한 추가적 정당화를 제공하는 것 대신, 상대가 곤란해할 지점을 공격하거나, 담론 주제를 벗어난 새로운 소재로 향하면서, 이 정당화를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가?
4. 재차, 의사소통 행위 속에서, 누가 생활 세계 속 일상적 규범들을 왜곡하여 자신의 타당성 주장으로 활용하는가? 혹은, 하버마스의 용어로, "의사소통 참여자들이 해석의 협력적 과정 속에서 길어 올리는 자명하게 여겨지는 것들의, 확고한 확신의 저수지(a reservoir of taken-for-granteds, of unshaken convictions that participants in communication draw upon in cooperative processes of interpretation, Habermas,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vol. 2, 1987, 124)"로 나타나는 생활 세계를 누가 (혹은 무엇이) 식민화하고 있는가?
5. 우리는 '민주적 말하기'를 충분히 학습해 왔는가? 현실에서, 동등한 의사소통 행위 속 참여자로서 우리는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향유하고 있는가? (Feat. 전문가라는 폭력성)
저는 심의 민주주의와 급진 민주주의 모두를 개괄하는 Part IV에서, 이 질문들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시도가 하버마스의 심의 민주주의 모델 속 '합의가 의미하는 것과 그 함의들'을 성공적으로 전달했길 희망합니다. 혹시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버마스의 오류가 아닌, 그를 압축적으로 요약하는 데 있어 저의 부주의함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다음 회차에서는 랑시에르의 급진 민주주의를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