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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민주주의는 합의인가, 갈등인가?

Part III. 랑시에르 에디션 - 급진 민주주의

by Sui generis

이 글은 제가 '빠띠'에 게시한 글을 옮겨온 것임을 밝힙니다. 출처: https://campaigns.do/discussions/2533.




동일한 제목으로 Part I에서 저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주로 '체계'의 관점에서만 이해할 경우 기저의 근원적 작동 원리를 놓치게 될 위험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 원리를 탐구하기 위해, 저는 최근 수 십 년 간 학계에서 흥미로운 논쟁을 벌이고 있는 두 가지 민주주의 모델 - 심의 민주주의와 급진 민주주의 - 에 주목해 볼 것을 제안했습니다. 저는 또한 본격적으로 이 모델들을 탐구하기에 앞서, 이들을 특징화 하는 '합의와 갈등'이 민주주의 속에서 모호하게 이해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 중 한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난 글을 참조해 주세요 (https://brunch.co.kr/@2h4jus/50).


Part II의 주요한 목적은 하버마스의 심의 민주주의 모델을 뒷받침하는 규범적 토대로써, 그의 의사소통 행위이론의 몇몇 주요한 요소들을 개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하버마스가 어떻게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통해 민주주의를 합의 지향적 모델로 구상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의사소통 행위'가 상호 간 관계적 책무성과 이해 지향성을 바탕으로 타당성 요구를 검토하고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핵심으로 강조되었습니다. 글의 말미에 저는 또한 하버마스 이론의 요약과 한국 내 실천적 적용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들을 제기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난 글을 참조해 주세요 (https://brunch.co.kr/@2h4jus/59).


이제 Part III로 향하면서, 이 글에서 저는 랑시에르의 급진 민주주의 모델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버마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랑시에르 이론 전반에 관한 상세한 소개는 한정된 공간으로 인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저는 그의 하버마스 비판의 맥락에서 랑시에르 급진 민주주의 모델의 주요한 특징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I. 랑시에르 vs. 하버마스: 유사성과 차이

하버마스처럼, 랑시에르 역시 '말하는 존재(speaking beings)'로서 평등에 기반을 둔, 그리고 논쟁과 실증의 절차로 구성된 민주적 정치를 이론화 하고자 합니다. 그는 (하버마스가 그랬던 것처럼) 일상적 담론, 혹은 언어적 행위가 사회 변혁과 해방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희망을 유기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따라서 두 이론가 모두, 지배와 억압의 편재성(ubiquity)를 선언했던 비판 이론 1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 전통의 비관론적 진단을 거부하고, 해방적인 사회 변화를 야기하는 일상의 발화와 행위의 역량을 지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랑시에르가 그리는 민주주의 역시 언어적 실천 밖에 있지 않습니다. 이는 하버마스 의사소통 행위이론에서 랑시에르의 이탈을 측정하는 것이 매우 미묘한 작업이라는 점을 시사합니다. 그럼에도, "그 자체의 합리성인 것으로서 불일치의 합리성(the rationality of disagreement as its very own rationality, Jacques Rancière, Disagreement: Politics and Philosophy, 1999, xii)"을 포함한 정치적 발언 (의견 불일치-dissensus)의 대안적 모델을 구축하고자 했던 랑시에르의 시도는 하버마스적인 언어-실용주의적 패러다임과의 결별 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이론가 간의 차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는 '담론의 전제 조건'에 대한 이해에 놓여 있습니다. Part II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버마스는 이상적 담론 상황을 구성하기 위해, 참여자들 간의 공유된 사전 이해(shared pre-understanding), 즉 의사소통적 합리성 속 서로를 향한 (최소한의) 합리적 인식을 가정합니다. 이 전제와 함께 하버마스는 합의를 지향하는 '우리'들의 타당성 주장 검토, 상호 간 합리적 책무, 상호 호혜성, 그리고 상호 인정의 태도를 구체화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반면, 랑시에르는 이 '공유된 사전 이해'라는 전제를 문제시 합니다. 그에게 사전 이해란, 단순한 이해의 기반이 아닌, '누가 말할 수 있고', '어떤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사전에 분할하는 일종의 권력(power) 장치 입니다. 다시 말해서, 랑시에르에게 공유된 사전 이해는 담론의 자격과 의미를 사회적으로 분배하는 체제인 것이지요. 살펴볼 것처럼, 이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그는 "감성의 분할(the Distribution of the Sensible, or partage du sensible)"이라는 용어를 차용하는데요. 이 용어는 그의 이론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미리 언급해 보면, 랑시에르는 정치가 이 공유된 사전 이해, 즉 감성의 분할이라는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는 순간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말할 수 없던 자들이 말하기 시작하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정치적 행위로 변형되는 순간이 바로 정치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버마스의 합의(consensus) 지향적 민주주의와 달리, 랑시에르의 합의 이전의 '불일치(dissensus)'가 정치의 근본적 장면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하버마스 담론 이론 속 권력에 관한 문제는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i) 아이리스 M. 영(Iris M. Young)이 '합리적 언어'로 말하기 어려운 현실 속의 많은 이들 (여성, 소수자, 빈곤층 등)에 관심을 기울였을 때 (참조: Inclusion and Democracy, 2000), (ii)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부르주아 공론장'의 배타성을 폭로했을 때 (참조: Justice Interruptus, 1997), 그리고 (iii) 에이미 알렌(Amy Allen)이 권력의 생산적-구성적 기능을 강조했을 때 (참조: The Power of Feminist Theory, 1999)는 모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이론 속 '권력' 문제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랑시에르의 입장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II. Do You Understand?

(이어지는 단락들의 내용을 압축하기 위해, Matheson Russell과 Andrew Montin의 소논문 - "The Rationality of Political Disagreement: Rancière's Critique of Habermas," [2015] - 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랑시에르는 "이해했어? (Do you understand?)" 라는 물음을 통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이론에서 간과될 수 있는 지점을 부각시킵니다. 랑시에르를 따라, A가 B에게 지시를 내리고, 이 지시사항에 대해 "이해했어?"라고 묻는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그가 보기에, 이 '가짜 의문문(false interrogative)'은 B가 A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취하도록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 보다, 이 가짜 의문문은 의사소통 행위를 실행하도록 하는 공유된 사전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상황 속 불일치의 위협을 조정하는 것이지요. 랑시에르는 "이해했어?"라는 발화자의 질문이 단지 두 가지 가능성으로 B를 제한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i) B는 A가 말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또는

(ii) B가 문제나 상황에 대한 A의 형식을 수용하는 한, B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가짜 의문문은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A에게, 몇몇 관점에서, 오해를 구성하지 않는 어떤 반대 의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스스로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일상 속 수 많은 사례들에서 반복되는 이러한 장면에서 우리가 거의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생략된 것은 하버마스가 의사소통 행위의 합리적 토대로 여겼던 타당성 주장 평가의 과업입니다. 이제, 이 평가 대신에 그 자리는 '불일치의 위험을 조정하는 이해'로 대체됩니다. 이 이해는 누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지, 그리고 누가 하급자의 입장에 있는지 (예를 들어, 누가 상사이고 노동자인지, 누가 선생이고 학생인지 등등)를 인지하는 당사자들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됩니다. 이는 당신이 노동자라면 (혹은 학생이라면), 언급되는 내용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할 자격을 갖추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청자는 발화자의 내용에 비판적인 태도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조건, 그리고 발화자는 발화 행위가 실제 합리적으로 수용가능한 이유를 제공할 필요가 없다는 조건 아래서, 지시는 사회적 행위를 조정하는 양식으로써 성공적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지요. B는 단지 노동자 혹은 학생이기 때문에, 그/그녀는 독립적으로 A의 발화에 대한 타당성 평가를 수행할 수 없게 되는데, 이들은 (아직) 그럴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Part II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버마스는 생활 세계로부터 공유된 사전 이해나 배경적 합의를 합리적 동의 뿐만 아니라 합리적 불일치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랑시에르의 예시는 이러한 전제 조건이 효과적으로 특정 발화자들이 (권위 있는 입장에 있는 이들), 원한다면 불일치를 '이해의 실패'로 구성함으로써, 하급자들을 동등한 의사소통 파트너로서의 참여를 배제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즉, "이해했어?"라는 질문은 불일치의 위험을 규제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그리고 이 규제적 권한이 다양한 집단들 사이에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랑시에르가“이해 했어?”라는 (가짜) 의문문이 하버마스가 생각하기에 누군가의 발화를 청자에 의한 합리적 평가로 제기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행해지는 '수행적 모순'을 조롱거리로 만든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이 의문문은 당사자들 간의 관계에 있어 불평등한 조건들을 지칭하고, 이 맥락에서 발화자는 당사자들의 발어적(illocutionary) 성공을 위해 청자의 합리적 승인이 요구될 범주를 결정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이지요.



III. 감성의 분할

이런 방식으로, 랑시에르는 '상호 간 이해'가, 하버마스식의 해석과 다른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상호 간 이해는, 하버마스의 형식처럼,

(i) 동등하다고 여겨지는 이들 사이에는 합리적으로 동기화된 합의의 기대로 조직된 이해의 규범적 구조가 작동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ii) 동등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이들 사이에는, 적어도 몇몇 상황에서, 합리적 의사소통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이야기되는 것의 이해와 채택의 기대로 조직된 "'해의 규범적 구조'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주의할 점은, 랑시에르가 문제를 논의하는데 있어 평등주의 혹은 상호 간 이해의 목표가 환상이라거나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지 않고, 합리적 정당화가 중요하지 않거나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랑시에르에 대해 언급하는 몇몇 사례들에서 흔히 간과되거나 종종 불충분한 설명으로 대체되는 지점입니다). 그 보다, 랑시에르의 주장은 좀 더 온건합니다. 그의 핵심 주장은, 상호 간 이해의 이 두번째 양식의 존재가, 하버마스의 주장과 대조적으로, 행위자들이 언어적 상호작용을 통해 공동의 이해를 성취하기 위해 발화자가 대화 파트너로써 청자의 동등한 지위를 가정하는 것이 필수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청자의 무자격을 전제로 하더라도, 합리적 담론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이지요.


이 맥락에서,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이라는 용어와 함께 사회를 '누가 말할 수 있는가'와 '어떤 말이 의미있는가'를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로 구성된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감성은 단순한 감각이 아닌, 공동 세계에 대한 접근 방식 전체를 의미합니다. 분할은 공동 감각의 접근권이 (이미) 사회적으로 구획되어 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감성의 분할은 감각과 감각 사이의, 즉, 감각적 경험의 형태와 이 경험을 이해하는 해석 사이의 일련의 관계들을 정의하는 매트릭스이다. 감성의 분할은 직업을 가정에 연결시킨다."

> "A distribution of the sensible is a matrix that defines a set of relations between sense and sense: that is, between a form of sensory experience and an interpretation which makes sense of it. It ties an occupation to a presupposition" (“The Method of Equality” in Jacques Rancière: History, Politics, Aesthetics, 2009, 275).


랑시에르는 의사소통 행위 속 하버마스의 '이상화된 전제들'과 마찬가지로, 감성이 분할된 공간으로써 사회가 허구(fiction)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상호 당사자 간 특정한 위계적 이데올로기라서 그런 것이 아닌, 이 당사자들이 마치 감각의 분배가 사실인 것처럼 행동한다는 점에서 마치 그런 것 같은(as if) 가정법적 세계를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지요. "이해했어?"라는 (가짜) 의문문이 현실에 구체적 효과를 가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감성의 분할은 실재하지 않는 허구이지만, 모두가 그 허구를 따라 행동하는 한 실질적인 구속력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이론을 비판할 때 랑시에르에게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적 태도 속에서 피할 수 없는 특징으로 가정되는 상호 호혜성이나 상호 인정의 허구적 본성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랑시에르는 가정법적 차원이 불가피하게 평등주의적 방식에서 구조화 되어 있다는 부주의한 가정에 우려를 나타냅니다. 하버마스가 발화 상황의 배경들이 이미 결정된 것으로 여기면서 타당성 주장이 작동해야 하는 상황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을 통해 공간, 대상, 또는 발화 주체들에 관한 발화 상황 자체를 조직하는 우발적이고 논쟁 가능한 가정들의 혼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감성의 분할은 단순한 인식의 문제가 아닌, 행위와 경험의 가능성 자체를 규정하는 장치입니다. 누가 발언할 수 있는지, 어떤 말이 의미를 가지는지가 이 분할에 의해 사전에 결정되는 것이지요.



IV. 정치적 불일치

이 맥락을 따라, 우리는 정치적 불일치(political disagreement)에 관한 랑시에르의 다소 간 기묘한 개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보기에, 정치적 불일치는 "발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그 발화 상황 자체의 합리성을 구성할 때마다 (whenever contention over what speaking means constitutes the very rationality of the speech situation, Rancière, Disagreement, xi)" 발생합니다. 즉, 감성의 분할이 우리의 행위와 믿음에 실질적 구속력 가지는 장치가 되는 한, 정치적 불일치는 단순히 어떤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정치적 불일치는 '말하는 행위'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고 벌어지는 다툼인 것이지요. 따라서, 이 다툼이 발화 상황의 합리성, 혹은 합리적 틀을 결정하는 순간, 정치적 불일치가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정치적 불일치는 감성의 분할에 관한, 그리고 사회적 상호작용의 당사자들이 말하는 존재로서 인식되는 혹은 인식되지 않는 방식에 대한 논쟁을 포함합니다. 하버마스와 달리, 랑시에르는 정치적 불일치를 화자들이 대화 파트너로서 서로 대화하지 않거나 할 수 없을 때 발생하는 분쟁의 형태로 여기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는 감성의 분할이 하버마스의 타당성 주장보다 선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이익과 가치의 여느 대립 이전에, 확립된 파트너들 간에 실증을 요구하기 위한 여느 주장이 제기되기 전에, 분쟁 대상에 관한 분쟁, 분쟁의 존재에 대한,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 대립하는 당사자들에 관한 분쟁이 존재한다."

> "Before any confrontation of interests and values, before any assertions are submitted to demands for validation between established partners, there is the dispute over the object of the dispute, the dispute over the existence of the dispute and the parties confronting each other in it" (Rancière, Disagreement, 55).


이는 정치적 불일치란 발언의 내용이 아닌, 발언의 의미 자체를 둘러싼 다툼이라는 랑시에르의 선언인 것입니다.



V. Police vs. Politics

이제, 랑시에르가 감성의 분할을 통해 묘사한 이미 구조화된 세계에 관한 개념화를 살펴봅시다. 여기서 우리는 police와 politics간 랑시에르의 구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police (혹은 policing)를 일상적 의미를 너머, "행동하는 방식, 존재하는 방식, 그리고 말하는 방식의 배치를 정의하는 질서( an order of bodies that defines the allocation of ways of doing, ways of being, and ways of saying, Rancière, Disagreement, 29)라고 정의합니다.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police는 감성의 분할을 통해 사전에 결정된 사회적 배치와 질서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반면, 그는 politics를 감성의 분할을 깨뜨리는 행위로 묘사합니다. Politics를 통해 말할 수 없던 이들이 발언하며, 들리지 않던 소리가 새롭게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랑시에르의 형식 속에서, 정치란 기존의 police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누가 목격될 수 있고, 누가 포섭될 수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배분을 재구성하는 행위 그 자체 입니다. 이 맥락에서, 그에게 진정한 정치란, 합의의 재생산이 아닌, 불일치(dissensus)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정치적 활동이란 어떤 총체를 할당된 장소로부터 이동시키거나, 어떤 장소의 용도를 변화시키는 모든 것이다. 정치는 원래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이게 만들고, 단지 소음으로만 여겨지던 것에 담론의 자리를 부여한다; 정치는 소음으로만 들리던 것을 담론으로 이해되도록 만든다.

> "Political activity is whatever shifts a body from the place assigned to it or changes a place's destination. It makes visible what had no business being seen, and makes heard a discourse

where once there was only place for noise; it makes understood as discourse what was once only heard as noise" (Rancière, Disagreement, 30).


따라서, 랑시에르의 정치적 틀 속에서, 대화 파트너로서 자신의 자격 박탈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하는 발화자들은 타당성 주장을 제기하거나 비판하는 것 이상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들은 발화 상황 자체를 문제시 해야하고, 문제 해결의 언어에 부합할 수 있는, 따라서 이 언어에 자격을 갖춘 화자로써 사회적 영역 속에 나타나야 하는 것이지요. 그는 우리가 정치적 발화와 행위가 의사소통적 행위와 동일해야 한다고 성급하게 가정해서는 안된다고 제언합니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발화와 행위에 있어 적절한 정치적 양식이 존재하지만 이는 대화적이지 않습니다; 정치적 불일치를 향한 합리성이 존재하지만, 의사소통적이지 않습니다. 합리적 책임과 상호 호혜성의 제약이 사실 상 무력화된 분할된 발화 상황의 맥락 속에서, 구획 그 자체가 논쟁의 문제로 주제화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 불일치의 무대 연출을 위해 랑시에르는 여섯 가지 구성적 특징들을 언급하고 설명을 덧붙이지만, 공간의 제약으로 저는 이들을 목록화 하는 것에 만족하겠습니다: (i) 평등의 가정, (ii) 논쟁과 은유의 융합; (iii) 비동일화 행위; (iv) 주석의 장치; (v) 평등의 입증; 그리고 (vi) 보편화 절차.



VI. 모든 갈등이 정치적인가?

살펴본 것처럼, 랑시에르는 정치를 '감성의 분할'을 교란하고, 기존의 질서가 전제하고 있는 발화 가능성과 의미 분배를 문제 삼는 행위로 정의합니다. 이 정의가 설득력 있다면, 우리는 모든 갈등을 '정치적' 이라는 틀 속에 한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랑시에르를 따라, 정치와 단순한 사회적 갈등을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이익 집단 간의 분쟁, 임금 인상에 관한 노동자와 경영진 간의 협상, 정책 우선순위를 둘러싼 정당 간 논쟁 등은, 언뜻 보기에 첨예한 (정치적) 갈등처럼 보이지만, 랑시에르적 의미의 정치적 사건은 아닙니다. 이러한 갈등들은 기존의 '감성의 분할' 구조, 즉 누가 말할 수 있고 어떤 이슈가 공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규정하는 질서 자체를 문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미 승인된 주체들 사이에서, 승인된 규칙 안에서 벌어지는 대립에 지나지 않습니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일상적 갈등들을 'police'적 질서 내부의 조정 과정으로 간주합니다. 다시 말해, 이 갈등들은 질서를 전복하거나 분할 구조 자체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질서의 내부에서 관리되고 통제되는 긴장들인 것이지요. 경찰적(policing) 논리는 이런 갈등을 제도화하고, 협상하며, 최종적으로 체계 내에서 통합하는 방식을 통해 작동합니다. 이 과정에서 갈등은 질서 유지의 수단으로 작용할 뿐, 질서의 전복적 재구성이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정치란, 기존의 승인된 주체성이나 감성의 분할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시도와 관련됩니다. 정치적 불일치는 단순한 이해 충돌이 아니라, 누가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지, 무엇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존재론적' 분쟁입니다. 정치적 행위자는, 그 자체로 규정되지 않았던 존재들이 발언하고 가시화되며, 사회적 장에 난입하여 그 장의 규범적 구조를 전복하려 시도합니다. 따라서 랑시에르의 틀 속에서는 모든 갈등이 정치적인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 갈등은, 기존의 질서(police)를 단순히 운영하거나 수정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고 균열을 내는 것이지요. 이는 '누가 발화할 수 있는가?', '어떤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둘러싼, 감성의 분할에 대한 불일치로서 등장합니다. 정치적 불일치는 체계의 균열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주체들과 그들이 던지는 질문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나는 것이지요. 즉, 정치란 '할당된 자리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주체들'과, '허락되지 않은 목소리로 발화하는 자들'을 통해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VII. Concluding Remarks

지금까지 저는 랑시에르의 하버마스 비판의 맥락을 따라, 특히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 그리고 정치적 불일치 개념을 중심으로 그의 급진 민주주의 모델을 스케치 해 보았습니다. Part II. 말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내용을 국내 사정에 어떻게 적용해 볼 수 있을까?"에 대한 검토는 Part IV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몇 가지 질문들과 함께 상기 내용들을 요약해 보고자 합니다. 역시 랑시에르에 대한 비판적 평가들은 예외로 하겠습니다. 랑시에르를 따라, polics와 politics를 구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과 함께 우리가 처한 현실을 함께 재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최근 한 정치인은 언론을 향해 "질문할 자유가 있듯, 질문을 거부할 자유가 있다"라고 발언했다. 이는 police적 질서, 즉 기존 감성의 분할 속에서 '누가 발언할 수 있는지, 어떤 질문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규정하려는 시도는 아닌가?

2. 'Again Yoon'이라는 구호는 police적 실천인가? 아니면, politics적 실천인가?

3. 우리는 치안(police)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정치 (politics)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얼마나 잘 구분하고 있는가?

4. (Question 3의 맥락에서) 최근 한국 내 새로운 목소리의 등장으로 분류될 수 있는 'Me too' 운동이나 페미니즘은 진정한 정치적인 순간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어떤 순간에서, 이 운동은 police의 공고화를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가?

5. 한국 내 기존의 제도적 치안 질서는(police-검찰, 군대, 종교 등등) 정치적 불일치의 가능성을 어떻게 차단하고 있는가?


저는 심의 민주주의와 급진 민주주의 모두를 개괄하는 Part IV에서, 이 질문들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시도가 랑시에르의 급진 민주주의 속 갈등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적절한 introduction이 되었길 희망합니다. 지난 회차와 마찬가지로, 혹시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랑시에르의 오류가 아닌, 그를 압축적으로 요약하는 데 있어 저의 부주의함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다음 회차에서는 지금까지 제기한 질문들과 함께, 한국 사회 진단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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