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V. 갈등, 존재론적 불일치, 그리고 페미니즘
이 글은 제가 '빠띠'에 게시한 글을 옮겨온 것임을 밝힙니다. 출처: https://campaigns.do/discussions/2604
Part I. A: 둘 다 아님? B: 철학적으로... 글쎄? (https://brunch.co.kr/@2h4jus/50)
Part II. 하버마스 에디션: 심의 민주주의 (https://brunch.co.kr/@2h4jus/59)
Part III. 랑시에르 에디션: 급진 민주주의 (https://brunch.co.kr/@2h4jus/58)
Part IV. 민주적 합의를 위한 우리의 시민적, 실천적 태도는? (https://brunch.co.kr/@2h4jus/60)
해당 주제의 다섯 번째 장으로써, 이 글은 갈등이 정치를 형식화하는 것에 관한 랑시에르의 급진 민주주의 이론을 통해 우리의 민주적 의사형성과 의지형성에 관한 진단을 시도합니다. 존재론적 불일치에 관한 미학적 재구성으로써 랑시에르의 이론적 시도는 우리 현실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적용될 수 있을까요? 그 사례로 저는 우리의 페미니즘에 관해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I. 질문들
저는 Part III에서 랑시에르의 급진 민주주의 모델에 관한 스케치를 제공할 때,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해당 챕터를 마무리했습니다.
1. 최근 한 정치인은 언론을 향해 "질문할 자유가 있듯, 질문을 거부할 자유가 있다"라고 발언했다. 이는 police적 질서, 즉 기존 감성의 분할 속에서 '누가 발언할 수 있는지, 어떤 질문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규정하려는 시도는 아닌가?
2. 'Again Yoon'이라는 구호는 police적 실천인가? 아니면, politics적 실천인가?
3. 우리는 치안(police)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정치 (politics)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얼마나 잘 구분하고 있는가?
4. (Question 3의 맥락에서) 최근 한국 내 새로운 목소리의 등장으로 분류될 수 있는 'Me too' 운동이나 페미니즘은 진정한 정치적인 순간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어떤 순간에서, 이 운동은 police의 공고화를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가?
5. 한국 내 기존의 제도적 치안 질서는(police-검찰, 군대, 종교 등등) 정치적 불일치의 가능성을 어떻게 차단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로 제가 의도한 것은 우리가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갈등들에 직면했을 때, 적절한 판단을 위한 참조점으로써 기준을 가질 수 있는가 여부를 따져보는 것이었습니다. 이 관점에서, 저는 랑시에르의 혁신적이고 도발적인 주장이 현대 민주주의 이론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 진단을 위한 우리의 실천적 태도에 상당한 공헌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이론가들이 지적해 온 것처럼, 그가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 다소 간 침묵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보기에, 우리의 목적이 현실 진단과 사회 분석이라면, 랑시에르는 분명 이 진단과 분석을 위한 인상적인 참조점을 제공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상기 질문들을 포괄하는 논의와 함께 이 주장을 뒷받침해 보겠습니다.
II. 미학적 정치, 미학적 사건으로써 갈등, 그리고 전광훈
원활한 논의를 위해, Part III에서 소개했던 랑시에르 정치 이론의 핵심 내용을 간추려 보겠습니다. 랑시에르에게, 정치는 새로운 법안 발의나 정책의 제정, 그리고 합의를 위한 합리적 의사소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의 합리성인 것으로써 불일치(disagreement)에 관한 자신만의 독특한 해설과 함께, 랑시에르는 정치를 '감성의 분할'을 결정짓는 감각적 질서를 교란하고 재구성하는 사건으로 정의합니다. 즉, 그에게 정치란, 기존의 감각적 질서 속에서 말할 수 없었던, 보이지 않았던, 들리지 않았던 자들이 새로운 무대에 등장하는 사건인 것이지요.
랑시에르는 기존의 감각 질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일체의 제도, 관습, 규범적 언어를 'police'라고 명명합니다. 그가 보기에, Police는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관리하는 기제이지만, 동시에 무엇이 정치로 여겨질 수 있는가를 미리 결정함으로써 불일치의 가능성을 차단합니다. 반대로, 랑시에르는 정치 - politics - 를 바로 이 치안적(police 적) 질서를 교란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공간으로 여깁니다. 즉, 그에게 정치는 기존 질서에서 존재하지 않던 주체가 나타나 자신을 드러내는 감성의 재배치가 발생하는 사건인 것이지요. 랑시에르는 정치적 활동을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정치적 활동은 어떤 대상을 그에게 할당된 자리에서 이동시키거나, 그 자리의 목적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보이지 않아야 했던 것을 보이게 만들고, 소음으로만 취급되던 목소리를 담론으로 들리게 만들며, 의미 없는 소리로만 들리던 것을 이제는 담론으로 이해되도록 만든다.”
> "Political activity is whatever shifts a body from the place assigned to it or changes a place's destination. It makes visible what had no business being seen, and makes heard a discourse
where once there was only place for noise; it makes understood as discourse what was once only heard as noise (Jacques Rancière, Disagreement: Politics and Philosophy, 1999, 30)."
우리는 흔히 갈등을 이익, 입장, 정체성의 충돌 등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갈등을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해석합니다. 그에게 갈등은, 단순한 의견 충돌이 아닌, 존재 가능성과 발언 자격을 둘러싼 감성 질서의 균열, 다시 말해 존재론적 불일치와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 불일치는 단순히 해결되거나 조정되어야 할 사안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보다, 이는 새로운 정치의 조건, 혹은 정치적 자격을 생성하는 미학적 사건인 것이지요. 이러한 점에서, 랑시에르에게 진정한 정치적 갈등은 질서의 일시적 혼란이 아닌, 감성의 질서, 감각의 분할 자체를 다시 쓰고자 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정치를 기존의 감각을 교란시키고 재구성하는 미학적 사건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랑시에르의 입장이 설득력 있다면, 우리는 그를 통해 우리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사건들을 재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면, 지난 계엄 국면에서 전광훈과 그의 지지자들이 빈번하게 언급했던 '국민 저항권'이나 '계엄령은 계몽령'과 같은 구호를 떠올려 봅시다. 이러한 구호는 그 자체로 급진적인 언어적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랑시에르적 관점에서, 이 언어들이 불일치를 열어젖히면서 새로운 정치적 실천에 문을 열고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기존의 감성의 분할을 공고히 하면서, police적 재분배를 도모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자유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곡해하며 '공산 전체주의'라는 모호한 가상의 적을 설정해서 자신들의 이익 도모를 지속하고자 하는 그 작태 말입니다. 정치의 영역에서, 이들은 불일치의 등장을 촉진하고 이를 수용하기보다는, 그 등장이 발생할 수 있는 감각의 공간 자체를 미리 틀어막는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의 언어를 모방하고 있지만, 실상 이들은 (랑시에르적인) 정치의 자리를 '치안의 연설(police speech)'로 메우고 있었던 것이지요.
III. 사례 - 우리의 페미니즘, 그리고 관련된 논쟁
한국의 페미니즘은 분명 지난 수년간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렬한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회 운동들 중 하나였습니다. 저는 애초에 이 운동이, 말할 수 없었던 자들이 말하기 시작하고, 쉽게 규정되기 어려웠던 고통이 가시화되며,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담론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에서, 랑시에르적 관점의 '정치적 순간' 혹은 '정치적 사건'이었음에 완전히 동의하는 바입니다. 기존 감성의 분할에 균열을 가하고, 새로운 주체의 등장을 알렸던 미투 운동이나 데이트 폭력 (그리고 참담하게도 살인까지) 고발은 police적 질서 속에서 은폐되었던 발화를 가능케 했고, 새로운 정치적 무대의 등장을 알린 사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새롭게 정치적 자격을 갖춘 이들은 곧 다양한 차원에서 새로운 갈등들을 야기했습니다. 여러 사례들이 언급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저는 이 운동이 (랑시에르적인) 새로운 정치적 순간이나 사건에 얼마나 감수성 있게 반응해 왔는지, 혹은 이 순간들과 양립 가능한 (혹은 적어도 응답 가능한) 주장들의 지속에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 여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대표적으로,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식의 언설, '진정한 피해자' 혹은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는 내부 규범화를 통해 페미니즘 내부의 발화 공간조차도 위계화하고, 따라서 자신의 규범적 언어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소음' 정도로 격하하는 행위 등은 (새로운) 감성의 분할 권한을 독점하는 담론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러한 예시들처럼,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치안적 질서처럼 작동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마도, 악셀 호네트의 말을 빌려 "완고한 도덕주의(rigid moralism, Axel Honneth, Freedom's Right, 116)"라고도 묘사될 수 있을 한국의 페미니즘 내 이러한 태도는 옳고 그름에 대한 자신들의 사적 이해를 보편타당한 것으로 환원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완고함은 다원주의, 타협, 혹은 타자 입장의 인정(recognition)을 위한 공간을 남겨두지 않으면서, 특정 진영이 자신들의 상호 작용과 사회적 관계의 모든 측면들을 (사적으로) 도덕화 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이지요. 자신들의 도덕적 틀을 절대화 함으로써, 이 진영 속 개개인은, 도덕적 자유를 사적 세계관의 교리적 주장으로 환원시키고, 타자를 소외시키며, 불관용을 촉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호네트의 완고한 도덕주의에 관한 보다 상세한 서술은 Ibid., 114-118을 참조해 주세요).
만일, 한국 내 페미니즘이, 샹탈 무페의 말을 빌려 랑시에르적 의미로써 '정치적인 것의 귀환(the retrun of the politics)'에 관심을 덜 기울이게 된다면 - 예를 들어,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주장에 저항하는 anti-feminism의 재정치화 - 이것이 반동적이라 해도, 새로운 정치적 사건의 등장에 지속해서 둔감하게 될 것입니다. 이 둔감성은, 정치적 실천이 ‘옳음(the right)’이라는 정당한 (혹은 보편타당한) 출발점에서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나타나는 또 다른 형태의 ‘옳음’에는 응답하지 않게 되는 자기 폐쇄성을 시사합니다.
IV. Concluding Remarks
다시 랑시에르적인 언어로, 이러한 페미니즘의 경향성은 애초에 politics이었던 것이 police로 전환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본래 불일치를 통해 정치적 공간을 열어젖히던 담론이, 역설적으로 새로운 감각의 질서를 공고화하고, 말할 수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다시 규정하려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정치적 실천이라 부르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페미니즘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그보다, 우리가 현실 진단을 위해 랑시에르에 의존한다면,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쟁이 사회적으로 통합될 수 있는 방식들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뿐이지요. 랑시에르 이론의 실천적 함의의 관점에서 말입니다.
특히, 한국 내 페미니즘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이를 둘러싼 논쟁들을 위해 요구되는 것들 중 하나가 우리 모두의 '연대적 책임감'이라면, 애초에 페미니즘이 발생했던 방식과 유사하게 (랑시에르적으로) 발생한 정치적 순간에, 즉 (새로운) 정치적인 것의 귀환을 적대시하거나 무관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체성 훼손으로 인한 고통과 불의의 경험을 (랑시에르적으로) 정치적으로 감지하고 응답하려는 민감한 감수성, 그리고 이를 사회적인 '우리'의 보편적으로 수용 가능한 언어로 다시 말하고자 하는 '연대의 의지'이지는 않을까요?
이 물음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단순히 작동 방식에 초점을 맞추는 정치 체계 하나만으로 해석될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그것이 심의적 방식이든 (하버마스처럼), 혹은 급진적 방식이든 (랑시에르처럼) 간에, 민주주의의 규범적 원리에 대한 초점은 이 체제를 향한 시민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다시, 우리 사회의 부정의나 사회 병리들이 결코 국가적 책무에만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이 연재글을 마무리하는 다음 회차에서, 저는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좋은 삶을 위한 민주주의는 어떤 외관이어야 할지에 관해 (감히) 제언을 시도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