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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합의인가, 갈등인가?" 연재를 마치며

Part VI. 우리 민주주의를 위한 제언

by Sui generis

이 글은 제가 '빠띠'에 게시한 글을 옮겨온 것임을 밝힙니다. 출처: https://campaigns.do/discussions/2626


Part I. A: 둘 다 아님? B: 철학적으로... 글쎄? (https://brunch.co.kr/@2h4jus/50)

Part II. 하버마스 에디션: 심의 민주주의 (https://brunch.co.kr/@2h4jus/59)

Part III. 랑시에르 에디션: 급진 민주주의 (https://brunch.co.kr/@2h4jus/58)

Part IV. 민주적 합의를 위한 우리의 시민적, 실천적 태도는? (https://brunch.co.kr/@2h4jus/60)

Part V. 갈등, 존재론적 불일치, 그리고 페미니즘 (https://brunch.co.kr/@2h4jus/65)




지금까지 저는 다섯 개의 Parts를 통해 민주주의를 '체계'의 관점이 아닌, 핵심적인 규범적 원리의 관점에서 논의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버마스의 심의 민주주의와 랑시에르의 급진 민주주의 개괄과 실천적 적용이 주를 이루긴 했어도, 제가 의도했던 바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 가능할 것입니다.


첫째, 민주주의 속 합의와 갈등이 각각 형식화되고 구체화되는 방식에 관한 이해는 우리가 현실 진단과 사회 분석을 위한 (규범적) 참조점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둘째, 민주주의를 체계가 아닌 규범적 원리의 관점에서 재고해 보는 것은, 특히 정치와 관련하여 국가의 역할과 시민의 역할을 구분하여, 후자가 우리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이한 방식을 탐구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첫 번째와 관련하여, 저는 Part IV and V에서 현실 진단과 사회 분석을 위한 (규범적) 참조점으로써,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이론 속 타당성 주장 검토, 그리고 police와 대비되는 랑시에르만의 politics 개념을 통해, 민주주의 속 합의와 갈등에 있어 우리가 의존할 만한 해석적 틀과 실천적 기준을 모색해 보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참조점은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조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특정 이론가들이나 개념들을 통해 이 (규범적) '참조점'에 대해 논의해 볼 것이고, 따라서, 관련된 추가적 논의는 이후로 미루겠습니다. 이제 두 번째 의도에 집중하면서, 관련된 논의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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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며

민주주의를 '작동 방식', 즉 체계의 관점에서만 이해할 경우 우리는 이 체계 속의 '작동 원리'에 대해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Part I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민주주의의 체제 환원적 이해는 technocracy, 또는 문제 해결을 위한 공리나 효율성 중심의 접근과 같은 문제들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선상에서, 한국 내 많은 구성원들이 민주주의를 상상하는 방식을 떠올려 봅시다. 단순화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마도 많은 '우리'들이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마음속에 그리고 있을 형식이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민주주의 = 정당 투표 (+ 그리고, 정치 고관여층에게는, 해당 정치인을 향한 지지와 후원, 감시와 비판)


재차 강조하지만, 저는 그동안의 연재를 통해 이 형식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 형식은 우리의 (대의) 민주주의 체계를 이해하고 소비하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보다, 제가 의도했던 것은 민주주의를 향한 이러한 이해가 (i) 제한적이고 불충분하다는 점; (ii) 몇 가지 중대한 문제들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 문제들 중에서 (iii) 민주주의 기저의 규범적 작동 원리에 대한 (체제와 비교하여 상대적인) 무관심의 일상화를 논의해 보고자 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점에서, 저에게, 하버마스의 심의 민주주의 이론과 랑시에르의 급진 민주주의 모델을 소개하는 일은 민주주의의 규범적 작동 원리들을 탐구하기 위해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저는 민주주의 속 서로를 향한 우리의 '규범적 태도'가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해, 몇 가지 현상들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제안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도가 분명 작동 방식으로써 민주주의 체계의 관점을 통한 현상 분석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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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체계 환원적인 민주주의 이해의 문제

우리가 민주주의 체계, 즉 그 작동 방식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민주주의와 관련된 몇몇 질문들은 발전적 논의가 구성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민주 공화국인 대한민국 속 우리가, 즉 민주 공화정의 시민들로서 우리가 서로를 향해 실천하는 태도는 공화적인가?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민주 공화국에 어울리는 공화적 태도를 갖추고 있는가?

그전에, 공화국은, 그리고 공화적 태도는 정확하게 무엇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는, 공화국이 지향하는 가치들은 무엇이고, 이 가치들은 각 개인이 어떤 방식에서 서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가?

민주 공화국은 대의 민주주의를 어떤 범주까지 허용하는가? 반대로, 대의 민주주의는 민주 공화국을 어떤 범주까지 실현하고 있는가?


제가 보기에, '민주주의 = 정당 투표 (+ 그리고, 정치 고관여층에게는, 해당 정치인을 향한 지지와 후원, 감시와 비판)'라는 형식은 우리를 정치적 대표자들의 도덕성, 정치인으로서 자격, 그리고 정당 구도 등에 대한 관심으로 인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일상적 삶 속에서 규범적인 민주적 원리가 작동하는 방식을 쉽게 자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 '시민적 덕성(civic virtue)'이나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시민성'은 정치 체계나 제도 밖으로 점차 밀려나게 되는데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체계적 접근과 함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 덕성이나 시민성과 점차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험적-역사적으로 시민적 덕성이나 실천적 행위자로서 태도가 사라지게 된 정치적-공적 공간이 무엇으로 대체되었는지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혁명 이후 자코뱅 독재에서, 나치 독일과 스탈린 소련, 좀 더 최근에는, 신자유주의 영향 아래 확장해 온 탈정치화, 정치의 상업화(commercialisation of politics) 까지. 특히, 정치의 상업화는 최근 수 십 년간 급격하게 악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치 영역에서, 공적 대표자로써 정치인이 상품이나 인플루언서처럼 자신을 포장하는 동안, 공적 주체로써 시민은 이들을 소비하는 수동적인 관객으로 전락했고; 공공선을 위한 정책들이 여론조사 데이터로 재단되는 동안, 공적 토론은 심의적 과정보다, 마케팅, 이미지, 감성에 대한 호소로 대체되어 왔습니다.

저는 이러한 정치의 탈시민화(de-citizenship), 혹은 주권의 외부화(externalization of sovereignty)를, 하버마스적 표현으로는, '시민 사회로부터 자생적으로 형성되는 의사소통 구조의 위축', 랑시에르적으로는, '치안화된 정치'라고 묘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경우 좋은 삶을 위한 조건들을 국가의 역할에만 독점적으로 귀속시키는 경향을 보이곤 합니다. 재차, 우리의 좋은 삶을 위해 국가의 역할은 필수적이고, 저는 이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좋은 삶의 조건을 실현할 무거운 짐을 국가 혼자서 짊어지게 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태도일까요? 민주주의 속 우리의 규범적 태도는 이 '좋은 삶'과 완전히 분리된 채 남아있어도 무방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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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민주주의를 우리의 상호 간 규범적 행위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민주주의를 더 이상 작동 방식으로써 체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작동 원리로써 규범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우리는 어떤 외관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시민적 덕성이나 공적 영역에서 실천적 행위자로서 우리의 규범적 태도와 관련된 개념들은 철학자마다 매우 다르게 정의되며, 때로는 서로 격렬하게 다툼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보기에, 과도한 일반화를 일부 감수한다면, 이들은 모두 민주주의를 단순한 제도적 형식이 아니라 시민 주체의 실천을 통해 구성되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서로 상이한 방식으로 '정치적 행위자로서 우리의 규범적 태도'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 서양의 정치-사회 철학 전통에서 시민적 덕성과 관련한 다양한 개념들은 서로 갈등, 경쟁하면서, 민주주의의 규범적 토대를 다층적으로 확장해 왔습니다. 어림잡아 보아도, 넓은 맥락에서, (i) 공화주의적 전통에서 공동체 속 시민적 책임, 의무, 그리고 공동선을 강조했던 아리스토텔레스 (폴리스적 덕성), 한나 아렌트 (공적 공간에서의 행위), 찰스 테일러 (인정의 정치),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 (덕 윤리와 전통적 실천), 마이클 샌델 (공동체적 덕성) 등; (ii) 칸트적, 혹은 헤겔적 규범 철학 전통에서 존 롤스 (시민적 우정), 위르겐 하버마스 (의사소통 행위), 악셀 호네트 (민주적인 윤리적 삶 속 우리), 낸시 프레이저 (반성적 시민성) 등; 그리고 (iii) 급진 민주주의 전통을 따라 (이들이 시민성 자체를 덕성으로 규정하진 않더라도, 민주주의의 실천적 정치 주체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자크 데리다 (환대의 정치), 샹탈 무페 (아고니즘적 시민성-agonistic citizenship),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 주체화), 셸던 월린 (순간적인, 혹은 다소 의역하여 제도화되지 않은 시민 정치로써 'Fugitive Democracy') 등은 우리의 실천적 규범성과 관련한 민주주의의 규범적 상상력을 확장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규범적 원리의 관점에서 논의가 시작될 수 있는 많은 지점이 존재하지만, 이 글에서 저는, 특히 한국 내 사정을 고려하여, 한 가지만 언급해 보고자 합니다: 서로를 향한 우리의 상호 호혜적(reciprocal) 태도. '상호 호혜적 태도'로 우선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적 공간을 벗어나 공적 공간에서 만나게 되는 이웃들, 나아가 낯선 시민들을 향한 사소한 존중의 행위, 제스처 등인데요. 저는 이러한 일상 속 사소한 행위나 제스처들이 서로를 같은 역사와 공간을 함께 살아가는 시민적 동료로서 이해하게 해 주는 실천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또한 이러한 감각이 민주주의를 제도나 절차 너머에서 지탱하는 규범적 토대, 혹은 문화로 내면화된 민주적 감수성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구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 속 상호 호혜적 태도를 예를 들어봅시다. 뒤따르는 이를 위해 문을 잡아주는 행위, 반대편 통행자를 위해 먼저 문을 열어주는 행위,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린 후에도 밖에서 버튼을 누르고 기다려 주는 행위,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간단한 눈인사나 웃음을 주고받는 행위, 엄격한 줄 서기 문화, 보행자에게 우선 통행권을 양보하는 행위, 점원에게 먼저 양해를 구한 후 필요한 사항들을 묻는 행위 (예를 들어,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공적 공간을 사적으로 남용하지 않는 행위 (예를 들어, 카페나 도서관에서의 사용 시간 엄수) 등등. 제가 보기에, 이 태도들은 모두 내가(I) 나와 다른 타자들에게(others)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존중과 응답 가능성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타인을 향해 상호 호혜적으로 행동함으로써, 나는 타자에게 시민으로서 자격을 증명해 주고, 반대로, 그러한 행위를 경험함으로써, 시민으로서 나의 자격을 입증받는 셈인 것이지요.


이러한 행위들은 결코 도덕적 요청이나 일종의 시민운동으로 달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방식으로 '상호 호혜적으로' 행동해야 할 동기나 정서적 거리감은 개개인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늘 (악셀 호네트를 따라) '규범성의 제도화'를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좋은 삶이 실정법 너머 일상적 차원에서도 논의되어야 한다면, 한쪽은 입법을 통한 '법적 제도화'의 관점을, 다른 한쪽은 이러한 상호 호혜적 태도를 기반으로 한 '규범성의 제도화'의 관점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사회적 존중에서 철저히 배제된 특정 직업군을 다시 존중의 영역으로 불러올 수 있는 일은 입법적 조치로만 달성되지 않습니다. 이 직업군에 속한 이들을 더 이상 비하하지 않는 우리의 시민적 책무가 요구되는 것이지요. 이 선상에서, '차별 금지법' 주변의 논의들이 이토록 혼탁해진 이유도 논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규범적 제도화의 관점에서 차별 금지법의 온전한 실현은 여전히 멀어 보입니다.


따라서, 한 사회나 국가가 개개인이 좋은 삶을 실현하는데 얼마나 공헌하고 있는가 물음은 반드시 두 가지 맥락에서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한, (i) 체제의 관점에서, 우리는 적절한 자격을 갖춘 정치인을 선출하고, 이들에게 우리의 좋은 삶을 실현시킬 수 있는 법적 제도화를 요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별개로 (ii) 규범적 원리의 관점에서, 우리의 좋은 삶을 위해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과 시민으로서 자격이 얼마나 우리 일상 곳곳에 새겨져 있는지, 즉 제도화되어 있는지 따져 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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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마치며

이 규범성의 제도화에 대해 더 논의해야 할 것이 많지만, 해당 연재글을 통해 제가 '규범적 원리의 관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재고 요청이 일부라도 성공적이었다면,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겠습니다. 저는 좋은 삶을 위한 우리의 민주주의는, 체제적 관점 이상에서의 논의를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의 규범적 원리의 관점에서, 만일 우리가 일상 속에서 서로에게 '상호 호혜적'인 문화적 감수성을 보여줄 수 있다면, 이것은 시민적 공동체를 향한 신뢰의 조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조각은 다시 민주주의를 우리 일상의 감각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타인을 향한 의무와 책임, 그리고 존엄한 관계의 방식을 가리키게 될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 일상에서 서로를 향한 규범성, 혹은 규범적 태도가 더 다양한 층 속에서 제도화될 수 있다면, 민감한 주제, 정책, 그리고 이념까지도, 좀 더 민주적인 방식에서 - 그것이 합의든 갈등이든 - 논의될 수 있지 않을까요? 종종 사회학적으로는 '이식된' 민주주의, 철학적으로는 '빌려다 쓴' 민주주의로 일컬어지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쩌면 일상 속 서로를 향한 상호 호혜적 태도가 그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이 연재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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