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vs. Philosophy, 그리고 정치, 사회 문화
철학 전공자들이나 이 업계 종사자들, 그리고 조금 더 폭을 넓혀, 철학자들을 제대로 읽어낸 경험이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 보통의 한국인들은 '철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소비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을 간접적으로 차용하면서, 한국에서 철학과 관련된 단어들이 어떻게 드러나고, 그 속에서 의미의 규칙이 형성되는지 가늠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 다음과 같은 어구들이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철학이 이해되고 소비되는 방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따라서 한국 사회 속 철학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명언', '삶의 지침',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한 도구', '인생의 의미를 찾아서..., ' '도덕적 교훈', '정신 수양', 혹은 '인격 수양' 등등.
이러한 한국 내 철학의 역할이 개개인의 well-being이나 좋은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분명, 철학 속 미덕과 관련된 윤리학, 그리고 옳고 그름에 관한 도덕론은 이러한 논의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한국 내 이러한 철학의 소비가 서구 사회에서 philosophy의 소비와는 다소 간 차이를 보인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몇 가지 질문들로 내 입장을 갈음해 보면,
1. 우리는 서구인들이 philosophy를 이해하고 소비하는 것만큼이나 철학적 태도와 논증적 분석을 차용하고 있는가?
2. 좀 더 자세히는, 보통의 한국인들은 특정한 철학자들을 독해할 때, 이들의 논증 과정을 그 의도까지 충분히 쫓아가고 있는가?
3. 혹시, 우리는 이러한 맥락들을 생략한 채, 철학을 단순히 '자기 계발을 위한 조언' 정도로 축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4. 그 결과, 한국 내 철학은 '명언 한 줄' 정도의 역할만을 수행하는 것은 아닌가? 예를 들어, 우리는 그의 명언 한 줄로 세네카를 이해했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덕은 인간의 유일한 선이고, 그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가난하고 불행한 존재다."
서구인들은, 따라서 철학 비전공자를 포함한 학교 내 나의 모든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philosophy'를 소비할 때, 가능한 그 맥락, 의미의 타당성, 그리고 논증의 정당화에 소홀하지 않고자 한다.
나는 이들의 philosophy, 혹은 philosophical ideas에 관한 이해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이 상상 가능한 사고의 끝을 정교한 논리와 언어로 다듬는 도구."
Philosophy의 이 도구적 역할은 서구인들의 삶 일반에 자리하고 있다.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한 토론 문화 이면에는 philosophy가 그 공고한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공적 토론과 정치적, 사회적 담론에서 철학적 개념의 차용은 낯설지 않다.
담화를 위한 비판적이고 논리적인 도구로써, 그리고 '생각하는 방식' 그 자체로써, 철학적 사고들은 존재, 실체, 지식, 앎, 믿음, 아름다움과 같은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문제에서 사회적, 정치적인 윤리적, 도덕적 딜레마, 종교나 과학적 증명의 타당성, 그리고 논리학, 법, 언어까지, 우리 주변의 다양한 논의와 주장에 대한 타당성과 정교함을 제공한다.
이 맥락에서, philosophy는 다양한 갈래로 분기되고, 한국에서 철학 전공자들 역시 이러한 범주 속에 있다:
Metaphysics, Epistemology, Ethics, Moral philosophy, Political philosophy, Aesthetics, Philosophy of science, Philosophy of Language, Philosophy of Religion, Philosophy of Mind, Logics, and Social Philosophy, and so on.
나의 철학 전공 분야에 한정에서, 사회, 정치 철학과 관련된 논의를 예로 들어보자.
민주주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이야기할 때, 심지어 사적인 자리의 일상적 대화에서 조차도, 서구인들은 자신들의 정파적 입장을 고수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보다, 이 토론의 한 방식으로서, 한쪽에서는 하버마스에 의존하여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한 상호 간 합의에 이를 수 있는 방식을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나가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 누군가는 민주적 본성으로써 갈등과 불화를 강조하면서, 랑시에르나 무페를 를 참고한다.
이런 방식으로, 민주주의 주변의 philosophical ideas를 기반으로 토론하면서, 이들은 특정한 감정적 대립을 지양한다.
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관해 토론할 때는 어떠한가?
누군가는 이상 이론(Ideal Theory)을 지지하며 완벽하게 정의로운 기본 구조를 상상한다.
여기에 ‘잘 정돈된 사회’에 관한 롤스의 개념이나 ‘순수한 평등주의적 정의'에 관한 코헨의 개념은 완전히 정의로운 사회에 관한 특징들과 정의의 원리들을 말할 때 좋은 참조점을 제공한다.
반면, 비이상 이론(Non-ideal Theory)을 지지하는 이들은, 아마티아 센이나 찰스 밀스를 참조하여, 다양한 실천적 제약과 부분적 순응을 포함한 실제 세계의 복합성을 강조한다.
이들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이상 이론에 회의적이고, 따라서 현재 상황을 좀 더 정당하게 만드는 방식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며 특정한 부정의를 해석하고자 한다. 이 접근이 정의의 이상적 개념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서구인들은 상대의 의견을 경청할 때, 그 정당성을 판단하기 위해 철학적 사고들에 의존하고, 반대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에게, 논의의 차원과 특정 철학자들에 대한 앎의 깊이는 별개의 문제이다.
알고 있는 것, 그리고 모르고 있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이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학습한다.
그 기저에는 philosophy를 토대로 한 논증 절차와 맥락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교하여, 한국 내 여러 공론장 역할을 하는 장소에서 흔히 목격되는 정치, 사회적 논의를 떠올려 보자.
안타깝게도, 다음은 내가 기억하는 우리 일상의 정치, 사회 영역 속 주요한 의제들을 대표한다:
'빨갱이', '2찍', '수박', '종북', '주사파', '틀딱', '찢', '분료견', '영포티', '영피프티', '페미', '한남', '소추' 등등.
우리는 이 어휘들과 함께 '감정적 충돌'과 '혐오' 이외에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들을 통해 서로를 '가장 참담한 수준의 공적 담론'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 내 철학이 소비되는 방식이, 지금과는 다른 양상으로, 서구 사회에서 philsophy가 소비되는 방식과 조금 더 유사해졌을 때 우리는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철학에 관한 우리의 발전적 이해가 아마도, 그리고 적어도, 한국에서의 철학이 주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그래서 '비실용적'인 학문 정도로 남아있도록 하진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이해와 함께, 한국에서 철학이 '팔자 좋은 양반들의 넋두리', 혹은 '밥 벌어먹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무쓸모'라는 오명에서도 자유로워 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철학 전공자들이 일상에서 묘한 시선으로부터 언제나 자신을 해명해야 하는 수고로움도 덜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