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 1. 상대방 비하와 잘난 척은
내가 존경에 마지않는, 그래서 현재 연재 중인 자유의 권리 저자 악셀 호네트의 또 다른 저서 The I in We를 이 글의 제목으로 인용했음을 미리 밝힙니다.
우리는 관계망 속에서 태어나고, 여기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누구나 엄마 뱃속에서 세포가 분열되고 나면, 부모든 혹은 양쪽 중 한 명이든 만나게 되고, 이후 교육 기관에서, 그리고 내가 역량을 펼쳐내는 사회, 경제 활동에서 우리는 수많은 이들과 함께 얼굴 맞대고 옷깃 스치며 그렇게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각자의 정체성이 결코 홀로 외딴섬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관계망에서 단 한치도 벗어날 수 없으니까. 그보다 우리는 같은 시대, 같은 역사를 살아가는 동료로서 서로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나'라고 주장해 봐야 나는 모든 관계망 속에서 온전히 내가 되지 않는다. 이 관계망 속에서 상대가 '나'를 '나'라고 인정한 범주까지 나는 비로소 내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정체성 형성에 큰 역할을 해 온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 관심이 많다. 이들과 어떻게 조화롭게 살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조화로움 안에서 무엇으로 나의 개성이 훼손되지 않은 채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연대성(solidarity)이라는 개념은 다양하게 설명이 가능하지만, 나는 앞서 내가 이야기한 맥락에서 이 연대성을 주로 해석하고 이해한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나는 우리의 연대성을 해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한다. 그것이 범죄든, 폭력이든, 혐오든, 차별이든, 그 이상의 무엇이든 간에.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나는 일상에서 우리의 연대성을 훼손하는 다양한 시도들을 목격하는데, 이들 중 (이러한 시도가 왜 지속해서 발생하는지 나중에 따로 써 보겠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접하게 되는 일이 있다.
각자의 신분, 지위, 명성 등등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는 대화 중에 수시로 상대방을 비하하고, 또 어떤 이는 수시로 잘난 척을 일삼는다.
이런류의 대화나 상황은 나에게 늘 부자연스럽고 어색한데,
내가 학문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경험상 내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상황은 상대방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럼에도 왜 이들은 모두 이러한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상황에 골몰할까?
이는 일정 부분 상대에 대한 공포심에서 유발된 것으로 보인다.
비하든, 잘난 척이든 간에 이를 통해 내가 마주하는 이와 자신 스스로를 동일한 선상에 높고 싶어 하는 것인데
상대를 나와 동일한 선상에 놓아야 그를/그녀를 나의 통제 안에 편입시키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만일 상대가 동일한 선상에서 나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는다면, 이는 엄청난 공포로 다가올 것이다.
내 전제가 옳다면... 아니 받아들일만하다면...
상대가 나를 비하한다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는 자신과 유사한 곳에 나를 위치시키고자 하는 시도일 것이다.
상대가 잘난 척을 일삼는다는 것 역시,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는 내가 있는 곳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고자 하는 시도일 것이다.
이제, 이런 가설을 세워두고, 철학하는 사람으로서, 철학적 검증을 시도해야겠지만...
직업적으로는 우선 내 논문을 써야 해서 당장은 어렵고, 또 사적으로는 (이게 사적인 일인지 아닌지 잘 구분은 안되지만) 요즘 글 쓰고 편집하며 브런치에 게시하는 일, 그리고 다른 훌륭한 작가님들의 브런치 속 글을 읽는 일로 바쁘니까 어렵다.
그래서 이 가설 검증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이렇게 글이 마무리돼서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모든 분들께 죄송하고 송구스럽다.
그래도 한 가지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이 글의 해당 섹션은 [칼럼니스트인 척]이다.
그러니까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