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민한 감정을 버릴 수 있다면.

만일

by twohfiveownn

"번민이 가득 차서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 "만수래일빈거 (滿手來一貧去) = 만일"로 향하세요."

정말 작은 글씨로, 좁쌀 속에 좁쌀이 있을까 싶은 화장실 구석 공간에 적힌 문구다.


"뭔 개같은 소리인거지, 어제 너무 피곤했나.."


어제 충격을 많이 받아서, 헛것이 보이나 싶었다. 분명 그럴 것이다.

나는 어제 과음한 탓에 머리가 반쯤 절여진 상태지만, 그래도 '저'정도 헛소리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나까지 그 충격이 왔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분별력은 남아 있지않은가. 난 지성인에 속하지 않는가? 아니, 잘 모르겠다.. 너무 혼란스러운 나는, 회사 화장실에서 모퉁이 글을 보면서 담배나 뻐끔 거릴뿐이다. 사실 하소연 하자면, 오래 만난 여자친구가 현실적인 문제로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았다는 사실이 첫째요. 헤어진 그 이유는 확실하진 않지만, 나의 무능력함과 불안한 미래인게, 그녀가 헤어지자는 이유의 핵심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 비참해진 내 기분이 파생된 두번째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해 상기 시키니 기분은 직전보다 빠르게 수직 하락했다. 마치 모든 돈을 때려넣은 상장 폐지된 주식처럼.

회사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를 물면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의 심리란 원래 이토록 불안한가? 어쨌든, 난 낙오자의 삶이구나. 내 너덜한 감정을 대변하는 것 같은 모양의 바지춤을 추켜올리면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거 알아? 요새는 부정을 받아주는 가게가 있대!"

말 많은 회사동료는 밝게 인사하듯 나에게 말했다.


이녀석은 원래 친한 동료 녀석인데, 버튼 누르면 뉴스가 나오는 기계처럼 새로운 소식을 이렇게 물어다 주곤 했다. '부정'? 그런 걸 받아서 어디에 쓰려고 하지? 이상한 가게구만. 혀를 내두르며. 흘리려던 찰나 문득 생각난 문구.


"아... 아까 그 화장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터져 나왔다.

동료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응? 무슨 화장실? 너 방금 다녀왔잖아. 혹시 어디 안 좋은 거냐?"

걱정하는 동료 표정에 나는 "아.. 별일 아냐 혹시 자세히 좀 얘기해 줄래? 그 가게에 대해서" 자연스레 넘기려던 찰나, 동료는 기다렸다는 듯 흥미진진하게 입을 뗐다. 인기많은 사회자처럼 말이다.

"어? 진짜? 너 혹시 벌써 알고 있던 건 아니지? 야,아까 그거 정말 신기한 도시괴담 아니냐? 내가 어제 점심 먹다가 옆 사람한테 들었는데 말이야, 글쎄 그 가게는 정말 죽을 만큼 힘들거나, 마지막 희망을 찾는 절박한 사람들 눈에만 보인다는 거야!"

.

.

.

아마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동료는 나의 표정을 살피고는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갔다.

"슬픔은 슬픔대로, 분노는 분노대로, 심지어 우울이나 불안 같은 것까지! 그걸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비밀이라는데, 정말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 눈에만 보여서 꾸역 마지막으로 찾아가서 맡기면 감정을 모두 처리해주고 신기하게 마음이 편해진다는 후기가 있더라고. 마치 절망의 늪에서 겨우 건져 올린 기분이라나? 조금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잠시 숨을 고르더니, 조금 더 흥분한 목소리로 묻지도 않은 것을 덧붙였다.

"위치는... 음... 정확히는 나도 못 들었는데, 시내 쪽 변두리에 아주 희미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곳이라고 하더라? 물론 실재한다는 증거는 당연히 없고, 정말 간절한 사람 눈에만 잠깐 보이는 환상 같은 거라던데? 소문의 의하면 고독하고 쓸쓸한 장소를 찾아보면 된다고… 마치 마지막 희망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신기루 같은 거지. 그렇게 따지고 보니 위치라는게 의미는 없긴 하겠다!"

동료는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감정을 쓰레기 버리듯이…'

나는 속으로 내가 편한 대로 해석해서 동료의 말을 되뇌었다. 헤어진 여자친구, 대출 잔금, 앞으로의 막막함…. 버리고 싶은 감정이라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기사, 내 생각엔, 그런 괴담에 이입해서 여기저기 쏘 다니는 것보다, 더 생산적인 일이 있을것이라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현실을 생각하자’ 나는 어른이니까.


"어, 퇴근 시간이다! 먼저 갈게!"

동료는 시계를 보더니 잽싸게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나는 멍하니 책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햇살이 사무실 안을 길게 드리웠다.


'시내 쪽 외진 곳… 쓸쓸하고 고독한…'

동료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까 화장실에서 봤던 이상한 문구.

"만수래일빈거 (滿手來一貧去) = 만일"

…. "'많은 것을 들고 와서, 빈손으로 나간다' 라..."

줄여서 '만일'이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그 동료가 말한 '모든 부정을 받아주는 가게'와 정확히 일치되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어른이니 어쩌니 해도 마음 속에는 정말 진심으로 그런 곳이 실재하길 바랐던 것 같다.


나는 조금 골똘히 생각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말장난도 아니고 내가 생각해도 네이밍센스가 형편없군."

한숨 쉬듯 말하고 나도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존재여부만 알아냈지, 갈 용기도, 정확히 어디 있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고독함과 쓸쓸한 곳은 의외로 양기가 가득 한 곳 아닌가?

공원이라던가.. 아니면 도심속 사이 골목이라던가.,

혼자 중얼거리다 보니 어느새 집안에서 들어와 양말을 벗고 있었다.

평소 하던 루틴인데, 이상하게도 그 수상한 도시괴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식사 후 기분전환이 필요했던 나는 식탁에서 천천히 일어섰다가 다시 앉았다,

"얼마 전까진 같이 식사했는데.."

나의 야망 찬 기분전환 시도는 실행도 못해보고 어제의 그 상실감이 바로 어깨를 죄여와 나를 엉망으로 때려눕혔다. 강아지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격렬하게 날 반겨준다.

나는 그런 녀석이 고마웠다.


뒤이어 안주로 사왔던 음식을 손질하고 조리를 시작했다. 사실 손질이라기도 민망하게,

요새는 혼자 살고 혼자 해결하는 사람들을 겨냥해. 무엇이든 빠르고 쉽게 간단하게 제공이 되는 것 같다.

이를테면 '밀키트'라던가. 나는 먹는둥 마는둥 하다가 귀찮아져서 침상에 누웠다. 삐걱 거리는 싸구려 낡은 침상은 나랑 비교 해보자니 서로 차이점을 찾는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지독한 자기연민.."


사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계속 나는 지금 상태의 나에 대해 합리적인 이유를 찾으려 한다.

스마트폰을 습관처럼 켜서 여자친구의 SNS 계정을 염탐할까 망설였지만, 결국 손가락은 멈췄다.

추잡한 내 모습은 둘째고, 이제 정말 끝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나머지는 내 생각과 별개로 남들 다 겪는 하루의 작별수순을 밟는 중이었다.

양치하고, 샤워하고, 영양제 먹고, 핸드폰 조금 보다가 얼굴에 한번 떨어뜨려주고, 아파하면서

살짝 눈물이 나다가 스르르 잠이 든다. "정말 모든 게 형편없다.."

잠시 후 야속하게도 새파란 볕은 눈감은 지 얼마 안 돼서 내 얼굴을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