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의 목소리

by 이해

한 페이지로 시작했던 독서는 어느새 하루 중 한 자리를 견고하게 차지해가고 있었다. 독서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게임은 자연스레 멀어졌다. 게임에 쏟는 시간을 고스란히 독서에 쏟으면서 큰 변화의 물결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씩 성장해 가는 게 느껴졌다. 게임 속 캐릭터를 레벨-업시키는 것보다, 나를 레벨-업시키는 게 더 재밌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다.


평생 실패를 두려워하면서 살았는데, "자주, 많이 실패하라"는 조언에서 많은 힘을 얻었다. 실패할까 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실패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건,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라고 하지 않는가. 후회는 지난날들로 족하다고, 이제는 후회 없이 살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언제든지 부장실에 사직서를 던지고 나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게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이었다.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새벽 4시쯤 눈이 떠졌다. 평소와는 다르게 눈두덩이가 무겁지도 않았다. 내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을 쓰자." 만약 주변 사람이 글을 쓰라고 했다면,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을 것이다. "에이, 내가 무슨." 하지만 내면의 그 단호한 목소리는, 나를 설득시킬 필요가 없었다. 메모장 어플을 켰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옮겨 적었다. 비록 형편없었지만,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 안의 무언가를 깨웠다.


그날 이후 직장을 다니면서 틈틈이 글을 썼다. 처음에는 나만 보는 글을, 나중에는 타인도 보는 글을 썼다. 내 생각을 드러낸다는 게 약간 부끄럽기도 하고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꾸준한 반복 앞에 그런 감정들은 사르르 녹아버렸다. 글 쓰는 게 재밌었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얻어서라기보단, 그냥 쓰는 것 자체가 재밌었다. 이십 대 초반,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 써보는 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글쓰기에 소질이 없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그 마음이 남아있었는지. '이제는 정말 책을 써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직장을 다니면서 책을 쓰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엔 퇴사를 해야 한단 말인데. 현실적인 문제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괜히 섣불리 도전했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면 어떡하지. 이러다 길거리에 나앉게 되지 않을까?


도전하고 싶은 마음과 걱정스러운 마음이 충돌했다.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당장에 일하지 않아도 반년은 버틸 수 있는 돈이 있었다. 그래, 어차피 당장 굶어 죽지도 않을 텐데. 한번 해보는 거야. 결과가 좋을지 말지 알 수 없지만, 실패하더라도 거기서 또 무언가를 배울 테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부장실로 향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방 안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부장님이 말했다. "어 그래, 무슨 일이야?" 막상 얼굴을 보고 얘기하자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망설여졌지만, 이제는 용기를 내야 할 때였다. "저, 그만두려고 합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갑자기 왜?" 부장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일이 안 맞는 거 같아서요. 할 만큼 하기도 했고요." 부장님은 말없이 한숨을 크게 쉬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꺼냈다. "그래, 이미 마음도 확고한 거 같은데. 내가 붙잡는다고 잡힐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 달 말까지만 하고 그만두는 걸로 하자."


사직서는 내 손을 떠났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이곳을 벗어난다는 해방감에 뛰었고, 백수가 된다는 불안감에 뛰었다. 그렇게 나의 좌충우돌 퇴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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