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는 자아

by 이해

직장도 나왔겠다. 이제 나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큰 적이 남아있었으니. 그 어떤 사람보다 나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사람. 그 녀석은 내 안에 산다. 세를 내준 적도 없는데 한 자리를 딱 차지하고선 온갖 말들을 쏟아낸다. 그동안은 이 녀석의 말에 휘둘려 그 어떤 도전도 하지 못했다.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하면, 곧바로 독설과 일침을 날리던 그였다. "네가 그걸 무슨 수로 할 건데?"


바깥이 아닌 내 안에서 멈추지 않고 떠들어대는 통에 이제는 이게 내가 하는 생각인지, 그 녀석이 하는 생각인지 헷갈리곤 한다. 어느새 '네가'가 '내가'로 변한다. "내가 그걸 어떻게 하겠어. 나는 원래 그런 걸 못해."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도 그랬다. 글쓰기는 나랑 맞지 않는다고. 글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글을 쓰는 거라고 말이다. 그때의 나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나 보다. 개개인은 다른 능력치를 갖고 태어나고, 그 수치에서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특정 영역에서의 능력치가 높은 사람은, 그것을 시작하자마자 능숙하게 잘 해낼 거라고 믿었다.


나는 어느 영역에서 재능을 갖고 있을까. 이것저것 건드려보았지만 잘하지 못했다. 한두 번 해보고선 이것도 나랑 안 맞네 하고 꼬리표를 붙인다. 웬만한 것들은 죄다 그랬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잘하는 게 없다. 땅땅땅. 단호한 판사의 망치질처럼. 명백한 오판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판결은 이미 내려졌으니.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깨닫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다. 책을 읽으며 내 안을 강렬하게 흔들어놓았던 문장이 있었다. "처음부터 잘할 수 있는 건 드물다. 모든 것은 충분한 시간을 통해야만 능숙해질 수 있다." 그때 깨달았다. 한두 번 해보고 잘하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었음을. 나는 잠재된 능력이 발휘될 충분한 시간을 나 자신에게 주지 않았다. 재능은 곧바로 드러나야 된다며. 재능이 있으면 시작부터 잘할 거라며 말이다.


나는 나에게 한 번 걸어보고 싶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해보고 싶었던 게 생겼는데, 이때 응원해주지 않으면 언제 또 해줄 수 있을까. '그래, 반년 동안 글 쓰는 데에만 집중해 봐. 혹시 모르잖아. 글쓰기에 나름의 소질이 있어서 작가가 될 수 있을지 말이야.' 형편없는 글만 쓰고 있는 나 자신에게 처음으로 해주었던 다정한 말이었다. 나는 다정한 믿음에 힘입어 도전의 길로 발을 내디뎠다.


다짐했다. 모아둔 돈을 다 쓰는 한이 있더라도, 6개월 동안은 일하지 않고 온전히 글쓰기에만 집중하기로. 평생을 나 자신과 살아야 하는데. 그 정도의 배려는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아니면 또 언제 하겠는가.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때는 더 어려워질 텐데.


그렇게 수십 년 동안 나를 괴롭혀온 의심의 목소리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넌 안 된다며. 결국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갈 거라며. 여전히 짓궂은 말을 내뱉지만. 나는 그 녀석에게 당당하게 선포했다. "그래? 하지만 이젠 내가 직접 해보고 판단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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