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함을 허락하기

by 이해

당당한 선포가 무색하게도. 나는 몇 날 며칠을 노트북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새하얀 공간. 그 드넓은 공간에서 커서만 홀로 깜빡이고 있었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역시 나는 안되나? 생각이 들었다.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백지에 처음 흩뿌려지는 글자들은 본래 날 것의 냄새를 풍겨야 하는 법인데, 머릿속에서 완성하고 꺼내어 놓으려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초고는 쓰레기라는 말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소 과격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글이라는 건 완성된 생각을 쓰는 게 아니라, 날 것의 생각을 쓰고 다듬는 것이었다. 위대한 작가들조차 다듬지 않은 글은 형편없다는 의미였다. 그게 꽤 많은 위안과 용기가 되었다. 대단한 작가들도 그렇다는데, 나라고 처음부터 멋진 글을 쓸 필요가 없지 않은가. 퇴고라는 멋진 무기가 있으니 말이다.


머릿속 감독관을 해고시키기로 했다. 글을 이렇게 저렇게 쓰라고 지시하는. 서툴고 미숙한 예술가에게 완벽함을 강요하는 그를. 나는 허락했다. "맞춤법, 문맥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그냥 네 의식의 흐름대로, 떠오르는 대로 종이에 옮겨봐. 그래도 괜찮아." 그와 동시에 내 안의 예술가는 자유를 얻었다. 터무니없는 생각들조차 쓸 수 있는 자유를. 드디어 진도가 나가기 시작했다. 기특한 녀석, 하루에 2000여 개의 글자를 써내다니. 며칠 동안 한 글자도 못 써내던 녀석이 말이야.


무언가를 도전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높은 기준을 들이밀 때가 많다. 시작부터 그 기준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에게도 초라한 시작이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기 자신에게 그 초라함을 허락하지 않는가?


글을 쓰면서 지난날의 내가 나 자신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깨달았다. 시작부터 잘하기를. 완벽하기를 바라는. 그 높은 이상에 맞지 않으면 곧바로 판결을 내려버리는. "봐, 너는 이것에 소질이 없는 거야." 정말 소질이 없어서, 재능이 없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가혹한 기준을 들이밀었기 때문일까?


나는 기꺼이 시작의 초라함을 허락하기로 했다. 형편없는 글로 페이지를 채우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자 내 안에 억압되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계획했던 분량을 써냈고, 출판사에 보낼 원고가 조금씩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약간의 가능성을 보았다. 내가 이렇게나 많은 글들을 써낼 수 있구나. 어쩌면 글쓰기에 재능이 아예 없진 않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 퇴사 후의 이 시간이 결코 헛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에 상관없이. 글쓰기를 전업으로 삼지는 못하더라도, 평생 데려갈 취미로는 삼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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