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 원짜리 도피

by 이해

처참히 짓밟힌 그날 이후로, 자투리 시간을 쪼개어 공부했다. 퇴근 후 인적이 드문 카페에 앉아 책장을 넘겼다. 그렇게 배운 것을 다음날 적용했다. 지식과 경험이 쌓이면서 일은 수월해졌고, 어깨 재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리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나름의 보람과 열정도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무시당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환자들로부터 비교와 평가를 당하는 건 모든 치료사의 일상이었다. 치료사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과 환자가 원하는 것이 자주 충돌한다. 환자는 당장 내 몸이 시원하게 풀렸으면 좋겠다며 주물러달라 한다. 치료사는 인지 능력이 떨어진 환자를 붙잡고 설득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움직여서 힘을 길러야 퇴원할 수 있다고. 돌아오는 건 불만 섞인 목소리다. 이 선생님은 치료를 못한다고.


매번 이렇게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현실에 지쳐갔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니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듣고, 휘두르는 주먹에 맞는 건 다반사고, 퉤 하고 얼굴에 침을 뱉는 사람들도 있었다. 뇌가 고장 나서, 아파서 그런 거라는 걸 알지만. 그걸 알면서도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게 우리 인간인가 보다.


점점 지쳐갔다. 활활 타오르던 열정은 꺼진 지 오래였다. 이런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의문만 가득했다. 몸이 힘든 건 그나마 견디겠는데, 정신적으로 너무 피폐해져 갔다. 환자뿐만 아니라 나도 치료가 필요했다. 요즘은 금융치료가 그렇게 효과가 좋다던데.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힘든 만큼 돈이라도 많이 벌었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내 노동의 대가는 최저시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일과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어떡해야 할까. 나이는 곧 서른에 가까워져 가는데. 이제 와서 재수를 할 수도 없고. 이 일 말고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인생은 정말 답이 없구나. 그냥 이렇게 견뎌내는 것밖에 없구나. 나는 인생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미래?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살란다.


게임은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게 해 주었다. 처음에는 심심해서 재미로 한두 판 했지만, 어느새 중독되어 버렸다. 온종일 게임에 빠져서 살았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핸드폰을 집어 들고 게임을 켰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출근길 버스 안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출근을 하고 치료실 한가운데 걸려있는 시계만 바라보았다. '언제 끝나지. 시간 참 안 가네.' 얼른 퇴근해서 게임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밤새 게임을 하다 잠에 들었다. 잠은 턱없이 부족해졌고, 눈 밑은 점점 어두워지더니 퀭한 얼굴이 되었다. 얼굴에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내가 점점 망가져가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술담배가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손을 뻗게 되는 것처럼.


직장생활 4년 차 때쯤이었다.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과 저녁식사를 했다. 오래간만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버지는 그리 심각하지 않게, 아주 가볍게 말을 꺼냈다.


"요즘 생활은 어떠냐. 돈은 좀 모았고?"


그 말이 내 안의 불안함을 자극했고, 외면하고 있던 현실을 똑바로 보게 했다. 분명 저축도 꼬박꼬박 했는데 돈이 별로 모이지 않았다. 심란했다. 왜 모이지 않는 걸까. 돈이 어디서 새어나가고 있는 거지? 의문이 생겼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구멍 난 곳을 추적했다. 그곳은 다름 아닌 게임이었다. 단순히 즐기기만 했다면 좀 괜찮았을 텐데. 나는 거기에 과몰입하는 바람에 적지 않은 돈을 쏟아부었다. 카드를 긁을 때는 얼마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맙소사. 그 얼마 되지 않는 돈이 다달이 쌓여 누적된 금액은 무려 천만 원이었다.


큰 충격을 받았다. 한 달에 이백만 원을 벌면서, 그 큰돈을 게임에 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자괴감이 들었다. 맨 정신으로는 견딜 수가 없어서 술 한잔을 하고 들어왔다. 적잖이 마신 덕에 눈은 반쯤 풀렸고 비틀비틀 댔다.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괴로울 땐 술을 들이켜고 잠이나 자는 게 최고라는데.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집 안은 너무나 적막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남겨진 느낌. 갑자기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눈물이 쏟아졌다. 살아생전 잘 울지 않던 나였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나를 통과하고 있었다.


한참 눈물을 쏟아내고 나자 지금의 내 상황이 명료하게 보였다. 이렇게 살면 10년 뒤에도 똑같을 거라고. 마흔에 가까워져서도 지금의 모습일 거라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날 밤, 나는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아직 불확실했지만, 이 자리에서 더는 버티지 않겠다는 것은 분명했다.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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