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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터 Oct 16. 2019

특별할 것 없던 20대 마지막 생일날의 일기

큰일이 터지고 여기저기서 괜찮냐고 물어왔지만 사실 괜찮을 리 없었다. 보기보다 멘탈이 약한 사람이라, 어둠 속에서 혼자 두려움에 시달리다 결국 한숨도 못 자고 생일날 아침을 맞이했다. 


날이 밝아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늘도 알지도 못하는 익명의 사람들에 분노하고, 세상에 환멸을 느끼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야만 했다. 굳이 일일이 다 봐야 하고, 모든 걸 알아야 하는 나의 직업도 원망스러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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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악의 생일이 될뻔한 오늘이 저물어가는 지금은, 어쩐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알차게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눈 뜨고 출근하고 퇴근해서 쉬는 게 전부였던, 딱히 특별할 것 없던 짧은 하루였지만, 돌이켜보면 그래도 좋았던 순간이 더 많았다. 비록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내내 무거웠지만, 오늘 출근길 하늘이 예뻤고, 사무실 창 밖으로 에어쇼가 보여 신기했고, 점심으로 나의 소울푸드 갈비탕을 먹었고, 동료들과 웃고 떠든 시간이 재미있었고, 퇴근길 노을도 예뻤고, 오늘따라 코노에서 노래가 잘돼서 뿌듯했고, 생일이라고 오랜만에 연락 준 친구들이 반가웠다. (아, 그리고 오늘 브런치 구독자 300명을 돌파했다!)


어쩌면 기억하지도, 인지하지도 못했을 수도 있는 일상 속 작은 기쁨의 기억들이 나를 살게 한다. 어제는 아팠고, 오늘은 괴로웠어도, 내일을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앞으로 이런 기억의 조각들을 더 자주 만들어가고, 더 많이 수집하기 위해 나는 더욱 살고 싶다. 그렇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삶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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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이 많아서 매년 생일 케이크 초를 부는 그 짧은 몇 초 안에 대여섯 가지의 소원을 욱여넣곤 했는데. 올해 촛불 앞에서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딱 하나뿐이었다. "아프지 않게만 해주세요. 나랑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 나와 우리가 함께 더 좋은 순간들을 많이 만들어나갈 수 있게.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내년엔 다시 욕심부릴 수도 있지만 지금은 정말 그거면 될 것 같다.


2019년 10월 15일의 작은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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