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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야경을
썩 좋아하지 않는 이유

4. 드레스덴의 간절했던 Feldschlößchen 맥주

by 이리터

Delayed.

베를린에서 드레스덴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린 지 2시간째. 30분 늦어지는 게 1시간 될 때까지만 해도 어쩔 수 없지 체념했는데, 2시간이 넘어가니 혹여나 여행의 중요한 순간을 놓치게 될까 심하게 초조해졌다.


야경이 멋지다는 드레스덴에는 20시간도 채 안되게 1박으로 짧게 머물 예정이었다. 저녁 7시쯤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쉬다가, 야경을 보러 나설 계획이었는데 저녁 7시가 되도록 베를린 버스 정류장에 발이 묶였다. 굳이 드레스덴까지 가는 유일한 이유가 해 질 무렵 '블루 아워' 사진을 찍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속상했다.


SAM_5275ㅂㅇ.jpg 밤 9시 25분, 드레스덴 중앙역 도착

밤 9시가 훌쩍 넘어서야 도착한 드레스덴. 한국에서는 이미 깜깜한 한밤중이지만 '맞아 여기 독일이었지..' 다행히 이제 막 해가 질 무렵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베를린에서 예쁜 쓰레기를 잔뜩 넣어온 탓에 족히 20kg는 됐을 캐리어를 끌고 한참을 뛴 것 같다. 겨우 체크인한 숙소에 짐을 대충 던져놓고, 어둑어둑한 골목을 지나 저 멀리 빛이 보이는 쪽으로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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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륄의 테라스로 나가는 길, 뮌쯔가세 골목


서두른 덕에 다행히 늦지는 않은 듯했다. 괴테가 '유럽의 발코니'라고 극찬했다는 브륄의 테라스, 그곳에 서서 엘베 강변을 바라봤다. 잔잔한 강물 위로 비친 하늘이 핑크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SAM_5333ㅂㅇ.jpg 브륄의 테라스

'명불허전'

드레스덴의 야경은 소문대로 대단했다. 말 그대로 '푸른 밤'인 이 맑은 배경에 빛이 그리는 그림을 그대로 담아가고 싶어 카메라 셔터를 수백 번 눌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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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 야경 파티


더 이상 카메라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질 때까지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보니 어느새 드레스덴이 끝나 있었다. 30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무언가 대단한 걸 본 것 같은데 휙 지나가버린 느낌이랄까.


어느덧 꽤 늦은 시각이라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데 왠지 발걸음이 안 떨어졌다. 사실 나는 화려한 야경이 끝난 후가 두렵다. 그렇게 거대하고, 밝고, 멋있는 판타지 세상에 있다가 한 순간에 현실의 적막 속 밤거리를 혼자 걸어 숙소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치안 문제가 아니라, 유독 야경과 대비되는 그 어둠이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쓸쓸한 착각이 든다. 야경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꼭 그렇게 속이 허하다.


SAM_5354ㅂㅇ.jpg 아니 어쩌면 나 혼자라 외로웠던 걸 수도..


저녁도 안 먹었는데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지금 이 속을 채워줄 만한 건 맥주밖에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맥주가 간절했다.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드레스덴 구시가지는 화려하고 도도했다. 모두들 식당이나 야외 바에 자리 잡고 가족끼리, 친구들끼리 맥주 한 잔 씩을 기울이고 있는 틈에 내 잔은 없었다.


SAM_5462ㅂㅇ.jpg 이 넓은 광장에 내 자리 하나 없네

괜히 광장 두세 바퀴를 하염없이 돌았다. 식당에 당당하게 혼자 들어가 바에 자리 잡고 맥주 한 잔, 간단한 안주 하나 시키고 팁을 넉넉히 주면 되는데, 2년 전의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식사 생각은 없어서 죄송하지만 병맥주 하나만 테이크아웃으로 팔 수는 없냐고 물어보고도 싶었지만 심지어 병맥주가 있을 만한 식당도 없어 보였다. 왜 서울에서 그렇게 흔한 편의점이나 마트조차 하나 없는지, 조금 서러웠다.


지금 맥주를 마시지 않고서는 오늘 밤 잠 못 들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뭐. 결국 터벅터벅 걸어 숙소로 돌아오는 수밖에.




탄산 비슷한 거라도 들어가면 속이 좀 채워질까, 숙소 프런트 데스크에 음료 자판기가 있는지 물었다. 자판기는 없고 저쪽에 매점이 있지만 아마 닫았을 것 같다고 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어쩐지 서둘러야 할 것 같은 본능에 이끌려 그곳으로 달렸다.


"아직 영업 하나요?"

"You are the lucky one. 이제 막 닫으려던 참이었어. 뭐 줄까?"


아, 살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10시 57분, 아마 11시에 닫으려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옆에 야경만큼이나 빛나던 그것, 바로 맥주 냉장고였다. (신이시여..)


"맥주 하나 추천해주세요."

"드레스덴에 왔으면 로컬 비어를 마셔봐야지. 필스너 괜찮아?"

"좋아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드디어 소원 성취

운이 좋은 오늘의 마지막 손님은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그렇게 갈망하던 맥주를 맛봤다. 허한 속이 비로소 채워지는 기분. '펠트슐뢰스헨' 어떻게 읽는지도 몰랐던, 처음 보는 맥주가 사람 하나 살렸다.


그날 밤, 도미토리에서 벗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인실을 쓰는 호사를 누렸다. 조용하고 어두운 방에 홀로 누워 하루를 돌이켜보았다. 오랜 기다림과 찾아 헤매던 시간, 그 사이 잠깐 반짝하고 빛나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 풍경이 또렷이 기억나지는 않았다. 정신 없이 감탄하다 이내 쓸쓸해진 느낌만 남았을 뿐.


혼자 보는 야경의 잔상은 금방 날아가지만, 그 여운은 참으로 오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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