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포틀랜드 Stumptown의 친근한 카페라테
포틀랜드는 나에게 꽤 친숙한 도시다. 5년 전 포틀랜드에서 2시간이 채 안 걸리는 유진(Eugene)이라는 소도시에 거주한 경험이 있다. 그 시절 나에게 포틀랜드란, 사방을 둘러봐도 자연뿐인 이 촌구석 오레곤 주의 유일한 도시. 너무 답답해 가끔 문명을 느끼고 싶을 때면 버스 타고 나가던 곳이었다. 물론 나의 모든 욕구를 채워줄 만한 대단한 도시는 아니었다. 유진에는 없는 고층빌딩 몇 채가 있어 다운타운 느낌이 나는 것, 소박하게 딱 '그만한 도시'였다.
한국에 돌아와서 미국 어디서 공부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늘 소심한 한숨으로 시작됐다. "오레곤이라고 캘리포니아 위에 있는 주인데.. 그냥 시골이에요." 아무도 모르는 그곳을 설명하는 최선의 답변이었다. 그렇게 떠올려 보는 그 시절은 행복했던 추억과는 거리가 멀다. 타지에서 혼자 사는 설움도 있었겠지만, 1년 중 여름을 제외한 봄, 가을, 겨울 내내 흐리고 비가 오는 우울한 기후 조건을 심심한 작은 도시에서 견디기란 꽤 힘든 일이었다.
이런 포틀랜드의 위상이 달라졌다. '킨포크 라이프스타일'이 전 세계적으로 대두되며 매거진B를 비롯한 다수의 미디어들이 포틀랜드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제 포틀랜드 근처에서 살다 왔다고 하면 "어머, 저 포틀랜드 진짜 가보고 싶은데!"라는 꽤 적극적인 반응까지 기대해볼 수도 있다. 자연과 로컬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힙스터들이 사는 모여 사는 곳으로 알려진 바로 지금 세계에서 가장 힙하다는 도시, 포틀랜드다.
도대체 그동안 포틀랜드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딱 5년 만에 포틀랜드를 다시 찾았다. 나의 기억 속 그 작고 어두운 도시가 어떻게 모두가 선망하는 잡지 속 '힙스터들의 성지'가 되었는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첫날 아침의 첫 코스로 한국의 미디어들이 가장 주요하게 다룬 포틀랜드 씬, 그 유명한 에이스호텔 로비에 앉아 로컬이 사랑하는 스텀프타운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에이스호텔 투숙객이 아니더라도, 스텀프타운에서 커피를 구매하지 않았더라도,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이 로비는 도시의 커뮤니티 역할을 한다. 눈치 볼 필요 없이 모여 서로 얘기하고, 각자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할 일을 해도 되는 곳이다. 물론 관광객인 나에게도 열려있다.
숙소가 위치한 펄 디스트릭트에서 에이스호텔까지 걸어가는 길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곳곳에 5년 전 추억이 보이는 흔적은 반가웠지만, 이른 아침이라 꽤나 쌀쌀한 바람이 불었고, 인적이 뜸하고 쓰레기와 낙엽만이 뒤엉켜 흩날리는 도로변에는 음산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오랜만에 재회한 포틀랜드와 아직 낯가리느라 고생한 나에게 위로가 되어줄 따뜻한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스텀프타운 커피는 처음이었다. 커피의 맛을 구별할 만한 전문가 수준은 못 되지만, 포틀랜드 사람들이 자부심을 갖는 커피라고 하니 이 커피 한 잔에 괜히 나도 이 도시의 일부로 점점 스며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라테로 속을 좀 달래고 나니 비로소 창밖의 도시 풍경과 옆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게 포틀랜드지' 도시 자체는 여전히 내가 알던 그대로 어둡고 무겁고 낡았다. 포틀랜드는 그대로다. 달라진 게 있다면 제삼자인 우리들이 '힙'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거기에서 찾아내기 시작했다는 것. 그게 지금의 트렌드일 뿐, 포틀랜드가 트렌드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hip이라는 단어에 '유행'이나 '선망'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면, 포틀랜드에 좀 더 어울리는 수식어로는 humble & rustic 같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유독 포틀랜드를 특별하게 만든 건 무엇일까? 그 자리에서 바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나흘 동안 머물며 스스로 내린 결론은 바로 '포틀랜드 사람들'이다. 홀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혼자 다닌 여행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소통할 수 있었다.
정류장에서 만난 한 아저씨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5분만 기다리면 버스가 온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최근 1~2년 사이에 갑자기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리는 상황이 신기해서, 포틀랜드 토박이로서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맞은편에서 상의를 입지 않고 기타만 맨 남자가 걸어오는데, 갑자기 나에게 하이파이브를 청해서 응해줬더니 오늘 최고의 행운이 나에게 깃들 거라고 노래를 불러주며 쿨하게 떠났다.
불쑥 다가온 홈리스는 자신의 딱한 처지를 설명하며, 가족을 만나러 가게 차비를 보태줄 수 있는지를 정중하게 물어보더라. 미안하지만 그 돈으로 나쁜 일을 할 수도 있어 거절했더니, 오히려 자기가 시간을 뺏어 미안하다며 인자한 미소를 보이고 떠났다.
극히 일부 예시지만, 내가 만난 포틀랜드 현지인들은 다들 어딘가 내 예상 범주 밖에 있었다. 특이한 사람들만 나에게 말을 걸어온 걸 수도 있겠지만. 미국에서도 <포틀랜디아>라는 코미디 드라마를 다룰 정도니, 같은 미국인이 보기에도 확실히 포틀랜드 사람들은 특이하긴 한가보다.
이렇게 타고나게 특이한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다 보니 특별한 도시가 된 게 아닐까. 천천히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음식을 나눠 먹는 루틴한 일상이 킨포크 테이블이 되었다. 스타벅스의 뜻에 반대하는 사람이 직접 원두를 고르고 볶아 나눠주다 마을에서 믿고 마시는 로스터리가 되고, 버드와이저보다 맛있는 맥주를 원하는 사람이 집에서 직접 연구하다가 브루어리가 됐다. 그렇게 개인의 취향과 집념이 골목에, 로컬 시장에, 도시에 변화를 불러일으켰을 테다.
흔한 미국 도시의 스케일이나 대단한 볼거리를 기대한다면 그만큼 실망하기 쉽다. 요즘 유행이라는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를 쫓기 위해서라면 머지않아 금방 잊혀질 수도 있다.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특이한 사람들이 모여 살면 어떤 멋이 나는지, 그 재미를 느껴보고 싶다면 포틀랜드에 가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