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교토 카모강의 싱그러운 이로하스 복숭아
'첫사랑 기억 조작'이라는 말이 한창 유행했다. "기억해 복도에서 떠들다 같이 혼나던 우리 둘"로 시작하는 f(x) 노래를 안다면 이 말의 뜻을 백 프로 이해할 테다. 아직 감을 못 잡겠다면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류의 대만 청춘 영화를 떠올려 볼 때 드는 풋풋한 아련함, 딱 그 기분이다. 무언가를 보고 들으며 내 과거를 회상하는 걸 넘어서, 마치 나도 한때 그런 사람을 좋아하며 그런 속앓이를 했던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 지경이다. (현실에는 없어요~)
나의 첫사랑은 어땠냐 묻는다면 글쎄, 어렵다. 끝내 마음을 전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그 후 만난 첫 남자 친구도 있었지만 '첫사랑'이라는 말에 딱 한 사람의 얼굴과 구체적인 일화들이 떠오르는 건 아니다. 첫사랑이 누군지는 몰라도, 첫사랑이 주는 그 느낌을 우리는 다 안다. 어쩌면 잠시 잊고 살았던 그 느낌을 아주 진하게 다시 받게 된 건 노래 때문도, 영화 때문도 아닌 '물' 때문이었다.
교토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을 꼽으라면 단연 카모가와, 특히 기온 시조부터 산조까지 따라 올라가는 강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강 자체는 규모가 큰 편은 아니지만, 교토의 중심이 되는 가와라마치와 기온을 사이에 두고 흐르고 있어 교토 시민들의 삶에는 꽤 중요한 부분일 테다. 여유 있게 산책하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바쁘게 향하는 사람들, 편하게 강가에 걸터앉아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교토의 일상 그 자체인 카모강이 낯선 이방인인 나를 흔들어 놓기 시작한 건, 은은한 핑크빛 노을을 닮은 이로하스 한 모금부터였다.
'일본 가면 꼭 먹어야 할 것 10' 리스트에 꼭 드는 그 유명한 일본의 복숭아 물, 이로하스 복숭아. 첫 입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2% 부족한 그 음료 맛을 생각했다면 오산! 첫맛은 가벼운 싱그러움, 끝에는 복숭아 과육이 통째로 입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듯한 벅찬 느낌. 그 느낌을 혀 끝에 간직한 채 카모강에 눈을 돌리니 이 맛에 대한 세상 명쾌한 정의가 번뜩 떠올랐다.
'아, 이건 첫사랑의 맛이다!'
1 년 전 어느 여름날, 그 날은 시간이 참 애매했다. 저녁 6시에 약속이 있는데 어쩌다 오후 2시에 약속 장소 근처에 나와있는 신세였다. 혼자 카페도 갔다가, 여기저기 구경했다가 해봐도 시간이 남아 근처에 있는 미술관에 들어갔다. 어떤 전시를 하는지도 모른 채, 무언가에 홀린 듯이.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다 전시 막바지에 필름을 상영하는 부스가 있길래 잠시 쉬러 들어갔는데.. 그때부터였던가요?
Dominique Gonzalez-Foerster의 <Riyo>, 주인공의 시선으로 걸으면서 보는 카모강의 풍경만 10분 내내 나오는 필름. 은은하게 어둠이 깔린 강은 온전히 주인공의 통화 내용에 집중하게 만든다. 모르는 번호의 여자에게 걸려온 전화, 처음에는 이름도 잘 못 알아들었지만 이내 생각이 났다. 아마 수년 전 학창 시절 서로 좋아했다가 표현을 못하고, 사정상 여자가 교토를 떠나면서 자연스레 연락이 끊켰다가, 오랜만에 다시 그때처럼 대화를 나누게 된 상황. 서로 어쩔 줄 몰라하는 어색함이 느껴지다가, 근황을 묻고 옛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며,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이내 한층 편해지는 두 사람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토록 아련했던 게 카모강의 풍경이었는지 두 사람의 통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짙게 남은 여운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저녁 6시가 다 되어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한 채 그를 만나러 나갔다.
그리고 지금, <Riyo>의 실제 배경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물살이 흐르는 소리와 뺨을 스치는 바람의 질감에 온전히 집중하다 보면, 강물과 바람처럼 마음도 요동친다. 카모강은 사람을 센치하게 만든다.
언젠가 나에게도 <Riyo> 같은 첫사랑이 있었던 것만 같다. 이 길을 걸으며 그 남자 주인공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색하게 통화를 끝내고도 계속 이 길을 걸었을까, 어디를 가는 길이었을까. 금방이라도 나에게도 낯선 전화가 걸려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핸드폰을 손에 꼭 쥐었다. 반대편 손은 남은 이로하스 한 병을 비우고 있었다.
이내 해가 저물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작품 속 주인공에 나 자신을 투영하던 감정이입도 끝이 났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본 첫사랑의 기분은 그랬다. 달고 싱그러우면서도, 밀려오는 수많은 감정에 이내 벅차다.
어느덧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나이라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사랑 앞에서 조건을 보게 되고, 괜히 밀당도 하고 싶어 진다. 그래도 정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여전히 어리고 순진한 마음으로 그를 대한다. 꼭 말 그대로 첫 번째 사랑이 아니라도, 여전히 그 시절의 순수한 떨림으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두 번째, 다섯 번째, 열 번째 사랑도 첫사랑만큼 예쁜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건 내가 <Riyo>를 본 그 날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만났던 너에게 하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