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발라드에 살면
발라드 같은 인생을 살까요?

2. 시애틀 Ballard의 느긋한 라벤더 차이

by 이리터


평일 아침 버스 안 모두의 영혼은 반쯤 나간 상태, 창 밖에는 매일 똑같이 건너는 한강, 줄지어있는 아파트와 건물들, 그리고 우리처럼 실려가는 자동차 안의 사람들. 낮과 밤만 바뀐 채 똑같은 풍경, 똑같은 사람들, 똑같은 공기가 그대로 퇴근길로 이어진다.


이렇게 매일 반복되는 노잼 일상이 마치 '소리 없는 후크송'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물론 그중에서도 의미 없고 시답지 않은 벌스의 반복뿐인, 정신없기만 한 아주 후진 후크송. 지겨웠다.




시애틀 여행을 준비하며 지도만 보고 여긴 꼭 가봐야겠다! 내 마음속에 저장해둔 마을이 있었다. 그 이름 바로 Ballard (아니, 어떻게 지역 이름이 발라드야?) 물론 우리가 아는 그 음악 장르 발라드(ballad)와 스펠링은 다른데, 중간에 r 발음이 하나 더해지니 이름이 주는 어감이 더 따뜻하고 부드러워졌다.


알고 보니 지금 시애틀에서 가장 힙한 동네. 길 따라 예쁜 식당과 카페, 편집숍, 레코드숍, 독립서점이 줄지어 있어 쉽게 설명하자면 '시애틀의 가로수길' 같은 곳이라고들 한다. (그 표현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시애틀 도심에서 벗어나 북서쪽 방향으로 30분 정도 버스 타고 달리다 보면 나온다. Ballard Avenue 표지판이 보일 때쯤 내렸다.


SAM_4808ㅂㅇ.jpg
SAM_4816ㅂㅇ.jpg


이 날 문을 연 가게는 거의 다 들어가 구경해본 듯하다. 예쁜 쓰레기도 실컷 사고, 괜히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도 살펴보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관찰하고.. 그러기만 해도 세상 재밌었다.


내로라하는 유명한 관광지나 비벌리힐스 같은 예쁜 부자 동네만큼 대단한 곳은 아니지만 충분히 예쁘고, 아기자기하면서 너무 가볍지 않게 앤티크 한 멋도 있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었다. 어떻게 동네 이름이 Ballard인데 진짜 분위기가 발라드 같을까. 1초에 한 번 씩 속으로 중얼거렸다. 발라드 최고다! 아, 여기 살고 싶다!


그런데, 발라드에 살면 발라드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을까?


글쎄, 살아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뭐 사람 사는 건 똑같은데 너무 느리게 흘러가거나, 감성감성하기만 한 인생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재미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치열한 경쟁과 루틴 속 후진 후크송 라이프에 길들여진 나는 발라드에 살아도 발라드 같은 인생은 살 수 없을까 봐. 사실 자신 없었다.




IMG_2069ㅂㅇ.jpg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두 여인의 여유가 부러워 이 곳에서 한 잔 하며 쉬어 가기로 했다. Anchored Ship Coffee Bar, 나에게도 어서 여기 닻 내리고 정착하라고 손짓하는 이름이었다. 들어가 보니 안쪽에도 꽤 넓은 공간이 숨어있고, 위에는 조그만 다락방 같은 복층 공간이 있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누군가의 집에서 음료 한 잔을 대접받는 포근한 기분이 들기에 충분했다.


이상하게 커피는 안 당겼다. 아니, 매일 마시는 거고 이 날도 이미 두 잔을 마신 상태라 그 흔한 커피를 또 마시기에는 살짝 아쉬운 분위기라 느꼈을지도 모른다. 특별한 맛을 찾아 다른 카페에서는 쉽게 보지 못한 새로운 메뉴 '라벤더 차이'를 주문했다.


IMG_2206.JPG
IMG_2104ㅂㅇ.jpg
맛있다 맛있다 20번 하면서 마신 인생 차이(chai)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다락방에서 혼자 홀짝홀짝 마신 라벤더 차이에서는 은은한 꽃향기가 기분 좋게 퍼졌다. 한국에서는 잘 팔지 않아 외국 갈 때마다 사 와서 회사 서랍에 쟁여두는 차이 라테 티백과는 비교가 안 되는 깊이 있는 맛이었다. 이 음료 한 잔이 태초에 라벤더와 찻잎일 때부터, 우유를 스팀 하고, 모든 재료가 한 몸으로 섞이기까지 그 향과 맛에서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좋아하는 발라드 가요 몇 개를 떠올려 보다가, 김형중의 '세살차이'가 딱 이 순간 bgm으로 알맞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차이를 마셔서는 아니고..) 듣기에 편안하고 따뜻한 이 노래를 들으면 릴랙스 된다. 힘이 쭉 빠지는 게 아니라, 가사와 음색 특유의 능글맞음에 마음이 사르르 녹으며 무장해제되는 기분이랄까.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여유로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발라드에 살면 발라드 같은 인생을 살까요?


작은 차이 잔을 거의 다 비워갈 때쯤 '그래, 딱 이 정도 템포에 맞춰 살면 좋겠다' 생각했다. 너무 빠른 후크송 템포는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고, 너무 느린 발라드 템포는 루즈하고 재미없다. 나의 나날들은 그 중간 어딘가, 김형중의 '세살차이' 정도의 미디엄 템포 발라드였으면 한다.


미디엄 템포 발라드 인생, 딱 이 열 글자를 마음에 새기고 발라드를 떠났다. 서울에 있는 나의 현실과 내가 동경한 시애틀의 어느 작은 마을과의 타협점이자, 조금 더 천천히 살라는 라벤더 차이의 교훈이었다.


SAM_4842ㅂㅇ.jpg


인생의 템포가 빠르다고 느껴질 땐 티 라테를 마셔보자. 급하지도 처지지도 않는, 딱 좋은 미디엄 템포 발라드로 나를 맞춰주는 메트로놈이 되어줄 테니.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