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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못생겨 보이는 시간,
수요일 오후 4시

1. 멜버른 St.Kilda의 밍밍한 생맥주

by 이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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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멜버른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그것도 무려 7년 연속 1위를 차지한 도시로 이름나 있다. 고작 나흘 살아봤을 뿐이지만 제3자의 눈에도 충분히 그럴 만한 도시였다. 도심 곳곳에 시민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거나 공연할 수 있는 공원이 있고,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을 때 산책할 수 있는 야라강이 흐른다. 아주 크거나 아주 작지도 않은, 괜찮은 삶을 위해 필요한 요소들이 잘 갖추어진 '딱 적당한 도시'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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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버른 CBD 공원(위), 야라강변 (아래)




St.Kilda(세인트 킬다)에 가기로 했다.


멜버른 근교에서 가장 유명한 바닷가인 Brighton Beach에는 기차를 타고 가야 하지만, 도심에서 트램을 타고 20분쯤만 달리면 거짓말처럼 드넓은 바다가 펼쳐지는 St.Kilda가 나온다. 관광지나 휴양지라기보다는 멜버른에 있는 수많은 공원 중 하나, 시민들이 언제든 가볍게 놀러 올 수 있는 쉼터 같은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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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바다 끝에 내가 떠나온 빌딩 숲이 보이고, 등 뒤로는 낯선 한가함이 느껴진다. 도시와 쉼터, 딱 그 경계선에 서있었다. 도시 가까이 이런 해변이 있다니, 마냥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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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놀이, 비치 발리볼을 하는 사람들, 가족·친구들과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고, 걔 중에는 온전히 햇빛과 이 공기를 즐기는 듯,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그 사람들 틈에 가만히 서있다 갑자기 조금 우울해졌다. 이 넓은 해변에서 유일하게 위아래 옷을 다 갖춰 입고, 어깨에 무거운 짐을 메고 있는 나만 이방인 같아 보였다. 어떻게든 놀아보려고 휴가 내고 비행기 10시간 타고, 트램 타고, 여기 바닷가까지 왔는데 혼자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곳 분위기와 낯가리느라 바쁜 내가 순간 초라해 보였다.


웬만하면 혼자 다닐 때 바닷가에서는 잘 안 마시려고 하는데, 속상해서 딱 한 잔 했다. (결국)


이땐 Peroni가 이렇게 가볍고 밍밍한 줄 몰랐지


해변가에서 제일 좋아 보이는 바에 무작정 들어가 메뉴판에서 가장 싼 생맥주를 시켰다. 기분 탓인지, Peroni 특유의 가벼움 때문인지, 맛은 드럽게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그늘에 앉아 천천히 마시며 (원샷을 못하겠더라) 이런저런 생각의 늪에 빠져버렸다.


저들은 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지? 달력을 보니 오늘은 수요일, 시계를 보니 오후 4시를 조금 넘은 시각. 공휴일도 아니고, 주말도 아니고, 저녁도 아닌데 수요일 오후 4시에 세상 팔자 좋게 누워서 노는 저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5년 전, 인터넷에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영국의 한 태닝 전문 회사의 조사에 따르면 여자가 가장 늙어 보이는 시간은 수요일 오후 3~4시경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다분히 불편하고, 쓸데없고, 순전히 자사 마케팅을 위해 만들어진 결론 같지만 (영국이 또...) 생각해보면 일주일 중 가장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시간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의 수요일 오후 4시를 생각해보자. 지칠 대로 지쳤는데 아직 끝났다는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일주일의 중간점. 퇴근까지도 아직 한참 남아 시계를 봐도 한숨만 나오는 애매한 시간. (뜻밖의 야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 수요일 오후 4시는 그런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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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분들은 왜 이렇게 행복하세요?

남은 맥주를 한 모금씩 비워낼수록 씁쓸해졌다. 멜버른이 살기 좋은 도시 세계 1위라는 건 알고 왔지만, 책이나 기사가 아닌 현실로 마주한 그들의 '삶의 질'은 나에게 상상 이상의 충격이었다. 이렇게 즐기면서 사는 사람들 많은데 현실의 나는 왜 그렇게 맨날, 무엇을 위해 걱정하고 신경 쓰느라 답답한 거지. 마음의 소리로 중얼거리며 열등감이 폭발했다.


그 자리에서 굳이 회사 단톡방을 확인하고, 회사 동료의 업무 질문에 답장을 보냈다. 고맙다, 이제 카톡 보지 말고 휴가 즐기라는 답변이 왔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는 걸.




말도 안 되게 살짝 취기가 올라왔다. (세상에 한 잔에..) 이대로 돌아가기 아쉬워 괜히 저 깊은 바닷속으로 끝없이 나있는 pier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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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햇빛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는지, 행복해 보이는 저 사람들이 얄미워서였는지, 자꾸 반대편 도시 빌딩 숲만 보며 걷게 되더라. 그럼에도 결국 내가 돌아갈 곳은 저기라는 걸 알아서였을까.


예쁜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내가 유독 못생겨 보였던, 씁쓸한 수요일 오후 4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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