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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28,449보 걸은 날,
걸을수록 보인다

Day 4. 센트럴파크 - 베슬 - 하이라인 - 첼시마켓 - 슬립노모어

by 이리터

피크닉을 정리하고 센트럴파크를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어찌나 넓은지 그렇게 많이 걸었는데 고작 4분의 1도 못 돈 것 같다. 공원이 뭐 나무랑 잔디밭 정도겠지 싶었는데, 센트럴파크는 구역마다 다 다른 풍경을 선보여 지루할 틈이 없었다. 군데군데 호수도 있고, 연못도 있고, 언덕도 있고, 배도 다니고. 이 정도면 도심 속 공원을 넘어 '도심 속 휴양지'라고는 해줘야 섭섭하지 않을 것 같은 다이내믹함이다. 볼거리가 꽤 많았고 그것들이 보이기 위해 꾸며진 가짜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Central Park - The Lake

센트럴파크가 명분 좋은 가식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던 건 아마도 이 안에 있는 사람들 때문이었을 거다. 이 공원의 일부분 같아 보였던 로컬들은 '찐으로' 아주 제대로 즐기고 있다.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 잡고 앉아 책을 읽거나 누워서 낮잠을 자기도 하고. 남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역동적으로 몸을 쓰기도 한다. 덤블링 연습하는 꼬마, 훌라후프 돌리는 사람, 진지하게 요가를 하는 사람. 다들 이 자연을 만끽하고 사는 것 같아 부러웠다. 여행의 딱 절반이 지난 시점에 여유를 느끼게 해 준 센트럴파크, 긍정적인 기운을 잔뜩 받고 간다.




다음 목적지는 최근 뉴욕에서 핫한 랜드마크로 떠오른 허드슨 야드의 베슬(Vessel). 사실 숙소 근처라 아침 일찍 구경 왔었는데 알고 보니 시간대별로 예약해야 입장할 수 있어서, 오후 시간대 티켓을 구해놓고 다시 왔다. 멀리서도 한눈에 '아, 저기구나!' 알아볼 수 있는 압도적인 존재감. 진짜 특이하게 생겼다.

구멍 숭숭 뚫린 빗살무늬 토기 같다고 생각..

베슬은 사람들이 직접 걸어서 올라가 볼 수 있는 전망대 구조물로, 올라가면서 다양한 시점으로 주변 경관을 감상하라는 목적으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시작점이 어디든, 올라가려면 뺑뺑 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기껏 올라왔는데 다음 계단을 올라가려면 올라온 만큼 내려가야 하는, 아주 약 오르는 구조랄까. 과연 끝이 있기는 한 걸까, 이거 꼭 '뫼비우스의 계단' 같다는 생각이 들며 현타가 올 때쯤.

Vessel

드디어 꼭대기 층에 도착해 내려다본 광경. 한쪽으로는 허드슨 강이, 또 다른 쪽으로는 전형적인 맨해튼의 빌딩 숲이 펼쳐져 있다. 고층빌딩에 있는 전망대에 비하면 그렇게 높지도 않은 높이인데, 앞뒤로 뻥 뚫려 있어서 그런지 손을 뻗으면 구름이 닿을 것만 같은 생생함이었다. 더운 날씨에 이만큼 올라왔다고 제법 시원한 바람도 분다. 올라오길 잘했다.

그래도 올라오길 잘했다




허드슨 야드에서부터 첼시까지 하이라인 파크가 쭉 이어진다. 옛날에 화물열차가 다니던 철로를 개조해서 시민들을 위한 고가도로 산책로로 조성한 곳이다. 인파가 많은 산책로 치고는 폭이 좁기는 한데, 군데군데 앉아서 쉴만한 자리도 있고. 어떤 구간은 빌딩 숲 사이를 가로질러 나있다면 또 어떤 구간은 자연 속을 지나가는 것 같이 제법 공원의 모양을 갖췄다. 이렇게 역사 속으로 버려질 뻔했다가 아이디어로 재탄생한 장소를 좋아한다.

The High Line

산책로에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는 공공예술 같은 조형물 보는 재미도 쏠쏠했는데 더 흥미로웠던 건 지나가면서 보이는 집들 구경하는 거였다. 공원에서 남의 집 창문 안이 살짝 보일 수밖에 없어서, 몇몇 집들은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포스터 같은 걸로 창문이나 외벽을 꾸며놨다. 그중에서도 유독 트럼프 대통령을 비꼬고 반대하는 문구와 그림을 내걸어 메시지를 외치는 가구들이 많이 보였다. 이런 자유분방한 포인트들이 하이라인 파크를 더 개성 있는 공공장소로 만들어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첼시 쪽으로 넘어오니 도로의 색이 조금 달라 보인다. 맨해튼 한가운데서 느낀 브루클린의 바이브랄까. 삐까번쩍한 빌딩만 있는 게 아니라 군데군데 낡고 허물어진 흔적도 있고, 광고판에 알 수 없는 외국어도 보이고, 훨씬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눈에 띈다. 확실히 윗동네보다는 더 자유분방해 보였고,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첼시 바이브

하이라인을 열심히 걸어 도착한 목적지는 바로 첼시마켓. 사실 마켓 자체가 엄청 특별할 건 없어 보였다. 다양한 식료품 가게, 베이커리, 레스토랑 등이 모여있는데, 옛날 공장 건물을 개조해 만들어서 조금 힙해 보인다는 정도?

Chelsea Market

여기까지 온 이유는 오직 하나,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랍스터를 맛보기 위해서였다. 랍스터 플레이스라는 가게에서 영접한 미디엄 사이즈의 랍스터느님. 생각해보니 이렇게 랍스터를 통으로 먹어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 칼집이 나있는 대로 집게 껍질을 뜯었더니 속살이 뿅 하고 나왔을 땐 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탱탱한 살을 버터 소스에 푹 찍어 먹어보니 와.. 이건 돈 많이 벌어야겠다 다짐하게 되는 맛이다.

Lobster Place

랍스터에게 미안할 정도로 살을 샅샅이 발라먹고, 사이드로 주문한 랍스터 비스크 차우더도 싹싹 긁어먹고, 입가심으로 필스너 맥주를 들이켜고 나니 다리 아프다는 생각이 싹 가셨다. 사람은 은근히 참 단순하단 말이야.




저녁에는 연극 '슬립노모어'를 보러 갔다. 아니, 보러 갔다는 표현보다는 '체험하러 갔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슬립노모어'는 6층짜리 건물 전체가 극장이고, 관객들이 가면을 쓰고 배우들을 따라다니면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보는 새로운 개념의 연극이다. 예를 들어 남녀 주인공이 같이 있다가 헤어지는 장면에서, 둘 중 더 스토리가 궁금한 쪽을 따라가면 뒷이야기가 펼쳐지는 식이다. 또 다른 층에서는 다른 배우들의 스토리가 동시에 펼쳐지고 있고.


공포스럽고 잔인한 거 절대 못 보는 쫄보라, 좀 무섭다는 후기를 보고 예매할까 말까 정말 많이 고민했다. 그래도 뉴욕까지 왔는데,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겠다 싶어 용기를 내본 거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거고, 또 혼자라면 엄두도 못 냈을 텐데. 여행 오니 이런 도전을 다 해본다.

극장 가는 길

가면을 받아 쓰고 입장하는데 시작하기도 전에 극장 안이 어둡고 음침해서 긴장됐다. 친구와는 잠시 떨어져 각자 마음 가는대로 관람하기로 했고, 나는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극도로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돌아다녔다.그러다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에 휩쓸려서 어쩌다 맨 앞에 서게 되었는데, 하필 거기서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이 모든 것들을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아주 나쁜 꿈을 생생하게 꾸고 있는 듯 했다. 무섭게 분장한 배우들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려 할 때,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밀어내고 맨 뒤 구석으로 도망쳤다.


그 충격으로 그때부터 스토리 쫓아다니는 건 포기하고, 흥미가 가는 쪽으로만 어슬렁어슬렁 구경 다니거나 힘들면 다 포기하고 그냥 멍 때리기도 했다. 혼자 쉬려고 앉아있는데 배우들이 하필 내 앞에 와서 연기도 하고 그래서 심심하지는 않았다.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지쳤을 뿐. 진이 다 빠졌을 때쯤 누가 내 옆으로 와서 팔을 턱 잡아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자세히 보니 친구였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드디어 이곳을 탈출할 수 있겠다!

Sleep No More @The McKittrick Hotel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나는 거의 혼이 나간 상태였다. 친구가 연극 어땠냐고 물어봤는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좋았어.."라고 답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꼭 좋지 않았어도 돼"라는 말이 돌아왔고, 그 말이 뜻밖의 위로가 되었다. 여행하면서 나와는 안 맞는 것도 있을 수 있고, 실망한 순간도 있는 법이지.


아니, 근데 진짜 좋았어. 어떻게 이런 신박한 기획을 했을까 보는 내내 감탄했고, 또 이런 문화 충격을 받으러 여기 뉴욕까지 온 거고. 좋은 경험이었는데 내가 그걸 담아갈 그릇이 못 된 게 아쉬웠을 뿐이다. 그래서 '슬립노모어'가 좋았냐고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묻는다면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루프탑을 찾았다. 가만히 앉아 말없이 야경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좀 진정됐다.

음료수로 건전하게 마무리

오늘 참 많이도 걸었다. 피크닉에 맛있는 거 사가려고 굳이 걷고, 센트럴 파크 안에서도 여기저기 걷고, 베슬 계단을 오르내리고, 첼시마켓 가려고 하이라인 파크를 걷고, 심지어 연극도 걸어 다니면서 봤다. 핸드폰 어플을 보니 총 28,449보를 걸었다고 나온다. 작년 유럽 여행 중 3만 보 넘게 걸은 날이 있어서 나의 역대 기록을 깰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번 뉴욕 여행 중에서는 가장 많이 걸은 날이었다.


헛된 걸음은 없었다. 28,449보를 걸은 덕분에 같은 동네에서도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었고, 진짜 맛있는 걸 먹고 행복해지기도 했고, 한국에서 절대 못해볼 경험도 했다. 다리는 아프지만 뿌듯했다. 씻고 나와서 침대에 잠깐 기대 누웠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기절해서 잠들었다. 그만큼 빡센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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