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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어서

Day 3. 미드타운 - 타임스퀘어 - 맨해튼 야경

by 이리터

여행 숙소로 한인민박을 선호하지 않지만 뉴욕에서만큼은 예외다. 맨해튼 한복판에 있는 고급 아파트 맨션에 묵어보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드타운에 있는 우리의 두 번째 숙소. 부엌과 욕실은 공용이지만 둘이 묵기에 충분히 크고 쾌적한 방이었고, 나름 고층이라 전망도 좋다. 말 그대로 자다 눈 뜨면 눈 앞에 맨해튼 뷰가 펼쳐지는 그런 곳이다.

IMG_3485.jpg 진짜 우리 집처럼 마음 편했던 숙소

하늘 뚫린 것처럼 퍼붓던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가고 옥상으로 올라가 봤다. 여기 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편의 시설인 루프탑 라운지가 뉴욕 시내 유명한 전망대나 루프탑 바보다 훌륭한 뷰를 자랑한다는데. 사실 이거 하나 보고 이 숙소를 예약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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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floor, 루프탑 라운지

역시 우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허드슨강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한눈에 들어오는 탁월한 위치다. 원래도 별로 생각은 없었지만, 굳이 입장료 내고 몇 시간 줄 서서 올라간다는 전망대에 안 가도 되겠다 싶었다. 이 뷰를 한번 보고 난 이상 다른 데에서 보는 뷰가 감흥을 주지 못할 것 같다. 이제 기대되는 건 앞으로 이곳에서 만날 파란 하늘의 뷰와 야경 뷰뿐이다.




숙소가 너무 편해서 계속 눌러앉아 있을 뻔했지만 시간이 아까워서 타임스퀘어에 한번 나가보기로 했다. 걸어서 20분 거리로 가깝진 않지만, 가는 길에 천천히 맨해튼의 중심부인 미드타운을 둘러보고 오면 좋겠다 싶었다. 비가 막 그친 뉴욕 거리는 습하고 후끈후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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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nsylvania Station, 8th Ave.

대망의 타임스퀘어. 사람들로 붐비고 시끄럽고 정신없는 데는 극혐이지만 전 세계에서 단 한 곳, 여기 타임스퀘어만은 예외다. 정신 쏙 빼놓는 이 화려함에는 사람을 설레게 하는 뭔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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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빡이는 사이에 전광판 그림이 휙휙 바뀌고 못 보던 사람들이 쌩 지나간다. 시시각각으로 눈앞의 광경이 달라지는 곳, 세상에서 가장 역동적인 장소이자 1초에도 수십억씩 펑펑 터지는 현장이다. 이게 바로 자본의 힘인가. 같은 곳에서 수십 번 셔터를 눌러도 똑같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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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s Square

해 질 때쯤 되니 날이 슬슬 개면서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때부터 천하의 타임스퀘어가 눈에 안 들어오더라. 아마 친구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거다. 딱 지금 이 하늘 아래 루프탑에서 보는 맨해튼 뷰, 얼마나 멋질까?

IMG_3688.jpg 뮤지컬 보러 또 올게

원래 유명한 피자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을 계획이었으나 이미 우리 마음은 떠났다. 오는 길에 봤던 작은 피자 가게에서 대충 테이크 아웃해서 루프탑에서 피맥 하자는 천재적인 아이디어가 나왔다. 콜! 하자마자 우리는 미친 듯이 뛰었다. 1분 1초가 급했으니 말이다. 하늘에 떠있는 해가 제발 조금만 더 버텨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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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다 급해




다행히 아주 늦지는 않았다. 푸르스름한 하늘에 핑크빛 구름이 살포시 깔릴 때 즈음 도착하니 이렇게나 멋진 뷰가 우리를 반겨줬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부터 허드슨 강까지 거의 360도로 맨해튼 전경이 다 보인다. 그것도 아까 비 오던 낮에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 위에 도시의 불빛이 끼얹어준 로맨틱 필터는 덤. 이 말도 안 되게 황홀한 광경에 슬슬 신이 나기 시작한다. 그렇지, 이게 뉴욕이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를 한눈에 즐기러 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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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이 지구 반대편에서 온 우리에게만 특별한 건 아닌가 보다. 한쪽에서는 뉴요커들의 파티가 한창이었는데 초대받아 온 외부 사람들도 여기 정말 멋지다며 감탄하고 인증샷을 열심히 찍어댔다. 하긴 뉴욕 산다고 해서 매일 같이 루프탑에 올라 야경을 보는 것도 아닐 테고, 이런 핑크빛 하늘을 만나는 날도 손에 꼽을 거다.


모두가 들떠있는 지금, 뉴욕 하늘이 초대한 성대한 파티에 우리도 함께 초대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지만 흥겨운 분위기만은 함께하며, 우리가 사 온 피자에 캔맥주를 곁들였다. 피자는 다 식었고 맥주는 미지근해졌는데도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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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 투나잇

어둠이 깔리며 잠시 차분해졌던 도시에 하나둘 불이 켜지며 이내 다시 화려해졌다. 야경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앉아 해가 저물어가는 모습을 감상했다. 여기서 보니 아득해 보이던 고층건물이 고작 새끼손가락만 해 보이고, 거리 위 자동차는 작고 빛나는 점 같다. 신기해서 넋 놓고 보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이 참 좋은데 왜 좋은 건지 확인하고 싶어 졌다. 왜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내다보고 싶어 할까? 친구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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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3823ㅎㅎ.jpg 색의 변화

우선 높은 곳에 올라와있으면 시야가 뻥 뚫려있다. 그러면 속도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 어느 것도 나를 가로막고 있지 않을 때 오는 쾌감이 있다. 어쩌면 옥상에 올라간다는 건 여유가 없는 답답한 이 도시에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쉽고도 확실한 방법일 수 있겠다.


그리고 조금은 객관적으로 큰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나의 세계를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형상화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지금 내가 있는 이 도시를 한눈에 내다보면 새삼 얼마나 크고 넓은 곳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나를 둘러싼 이곳 안에서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며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또는 잘 살고 있다는 자극과 위로를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IMG_3856 3.jpg Memorial Day 가념 빨+파+흰 조합

새카만 밤이 될 때까지 루프탑에 앉아 야경을 감상했다. 지금 이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골라 작게 틀어놓고, 한참 동안 나름 진지한 대화를 꽃피웠다. 여러모로 유독 여운이 길게 남았던 뉴욕에서의 세 번째 밤이었다.

절대 잊지 못할 야경




마음 같아서는 루프탑에 밤새 앉아있고 싶었지만 다시 소나기가 한두 방울 떠어져 결국 방에 내려와 씻고 잠을 청했다. 푹 자다 잠깐 깼을 때가 아마 새벽 4시 반쯤이었을 거다. 아직 깜깜한 밤이겠지 싶어 창밖을 봤는데 깜짝 놀랐다. 이 시각까지 환하게 불 켜진 건물도 많고, 텅 비어있을 줄 알았던 거리 위로 차도 쌩쌩 다닌다. 'The city that never sleeps'라는 표현이 비로소 이해가 됐다. 하필 눈에 들어온 창 밖의 맨해튼이 너무 밝고 바빠 보여서 다시 잠들 수 없었다.

IMG_3927.jpg the city that never sleeps

그 사이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더라. '뉴요커들은 정말 바쁘게 사는구나'로 시작해서 '나는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할까'로까지 이어진, 절대 끝이 날 수 없는 고민을 시작해버렸다.


지금 내 머릿속이 이렇게 복잡한 걸 어떻게 알았는지, 딱 이 타이밍에 한국에서 뜻밖의 연락을 받기도 했다. 휴가 끝나고 돌아오면 다시 얘기하자고 마무리됐지만, 나는 그 안부 인사가 어떤 의미였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이게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레면서도 긴장되어 또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들을 허공에 나열하느라 치열한 밤을 보냈다.


결국 세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날이 밝았다.

IMG_3937.jpg but always d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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