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 링컨스퀘어 - 어퍼웨스트 - 센트럴파크
아침이 밝았다. 꼼짝 않고 있다가 드디어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거다. 본격적으로 오늘의 여행을 나가기 전에 이 숙소에 머물 동안 간단히 아침으로 먹을거리를 사 오기로 했다. 잠옷에 대충 겉옷만 걸쳐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마트에 다녀왔다. 심하게 내추럴한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도 집 앞 슈퍼 나온 현지 사람 같아서 웃음이 났다.
생각해보니 이번 여행에서 마트 구경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교환학생 시절의 추억으로 미국 마트에서 가장 그리웠던 건 요거트 코너였다. 한국 마트에서 볼 수 있는 요거트는 몇 가지 과일 맛이 전부인데, 미국에는 민트 초코 맛, 메이플 시럽 맛, 키 라임 파이 맛 등 상상을 뛰어넘는 다양한 맛의 요거트 컬렉션이 있다. 그렇게 큰 대형마트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종류가 너무 다양해서 선택 장애가 올 지경이었다. 고민 끝에 도전해보고 싶은 요거트를 골랐고, 물과 음료수, 그리고 야무지게 과일도 사 왔다.
숙소로 돌아와 차린 아침 한 상. 창가에 있는 간이 식탁에서 맨해튼을 내다보며 나름 여유로운 아침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별 거 아닌데 참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내가 골라온 팝핀 코튼캔디 맛 요거트는 엄마한테 들키면 등짝 맞을 것 같은 비주얼과 맛이었어서 괜히 짜릿하기까지 했다.
뉴욕에 머무는 8일 중에 가장 날씨가 좋은 날 센트럴파크에 가자고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인 것 같다. 쨍하고 파란 하늘이 펼쳐진 축복받은 날이다. 센트럴파크를 목적지로 정해놓고 31번가에서 58번가까지, 버스를 타고 맨해튼 북쪽으로 올라갔다. 고층빌딩이 그렇게 많은데도 창밖의 뉴욕은 계속 공사 중이다. 아직 더 올라갈 곳이 남았나 보다.
센트럴파크에서 피크닉을 즐기고 싶은데 뭘 먹을지가 최대 고민이었다. 피자는 어제 먹었고, 햄버거를 테이크 아웃해가자니 또 패스트푸드는 안 땡겼다. 여행 4일 차, 마침 쌀밥이 살짝 그리워질 타이밍이라 초밥 도시락을 사 가면 어떨까 제안했다. 아무 백화점에나 들어가 지하 푸드코너에 가보면 분명 초밥집 하나는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들어오게 된 타임 워너 센터. 화려하고 럭셔리한 백화점은 아니지만 깔끔하고 정갈함에서 나오는 고급진 멋이 있다. 통유리창을 통해 정면으로 콜럼버스 서클이 보이는 게 꼭 '마! 이게 천조국의 자본주의다!' 이런 느낌이었달까. 역시 예상대로 몰 지하에는 초밥을 테이크아웃 해갈 수 있는 가게가 있었고, 연어초밥과 유부초밥을 하나씩 샀다. 메인 메뉴 선정부터 이미 성공적인 피크닉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링컨 센터. 음악, 무용, 연극 등 다양한 문화예술을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는 최초의 복합예술공간이란다. 친구가 공연 시간을 알아보고 싶다고 해서 잠깐 들어갔고, 나는 그 주변을 구경하며 산책했다. 세계 최고의 음대라는 그 유명한 줄리아드 스쿨도 여기 있었구나.
걷던 중 발견한 낯익은 이름의 서점. 파리에 있는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가 뉴욕에도 있었다니!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 봤다. 조용한 북카페 가보면 책 읽는 사람은 없고 노트북 켜놓고 일하는 사람들만 있는 건 만국 공통인가 보다. 그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음료를 테이크 아웃해서 나가기로 했다. 갈증이 나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세상에서 가장 쓴 지옥의 아메리카노여서, 얼음이 다 녹기 전까지 차마 마실 수가 없었다는 슬픈 이야기.
이제 센트럴파크 도착 전 마지막 목적지.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할 음식 25가지' 중 하나로 꼽혔다는 르뱅 베이커리의 쿠키를 디저트로 사가기 위해서다. 다른 취향과 견해는 용납하지 않는 듯한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00' 류의 큐레이션을 싫어하지만, 이렇게까지 구체적이면 한 번쯤은 혹하는 게 사실이다. 다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한 번쯤은 가보고 싶어 진달까.
르뱅 베이커리는 정말 코딱지만 한 반지하 가게였는데 밖에서부터 웨이팅을 해서 들어갔다. 그 비좁은 곳에서 쿠키를 공장처럼 찍어내고 있었다. 엄청 달아 보여서 하나를 다 먹기에도 버거울 것 같은 비주얼이었지만 여길 언제 또 와보겠냐는 마음으로 두 개씩 샀다. 달달한 쿠키 냄새에 기분이 한껏 업됐다.
센트럴파크 입성! 오늘 마침 미국의 공휴일인 메모리얼 데이고, 날씨도 환상적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정말 많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과연 여유를 느낄 수 있을지 불안하긴 했지만 설렜다. 더운 날 여기까지 오는데 많이 걸어서 살짝 지쳤는데, 공원 안에서도 피크닉 하기에 가장 좋은 스팟이라는 '쉽 메도우'를 찾아 또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했다.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 쉽 메도우에 도착하자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드넓은 잔디밭 끝에 펼쳐진 빌딩 숲, 자연과 도시의 경계에서 행복한 얼굴들이 뛰어놀고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토록 건강한 활기가 넘치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나. 가만히 서있어도 살아 움직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래서 다들 센트럴파크, 센트럴파크 하는구나. 6년 전 추운 겨울날 왔던 황량하고 메마른 센트럴파크가 본모습이 아니었구나. 뉴욕에 머무는 날들 중 가장 날씨가 좋은 날 센트럴파크에 오기로 한 건 참 잘한 일이다.
나무 그늘 아래로 도심이 정면으로 보이는 명당에 자리를 잡았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 한국에서 피크닉 매트를 준비해온 친구 덕에 편하게 두 다리 뻗고 앉아 사 온 음식을 쭉 펼쳐놓고 제대로 피크닉 기분을 낼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연어초밥은 탁월한 선택이었고, 르뱅의 초코칩 쿠키는 겁나 달았지만 쓰디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곁들이니 디저트로 훌륭했다.
다 먹은 음식을 치우고 가만히 앉아 사람들을 관찰해본다. 길거리나 상점에서 만난 뉴요커들은 대부분의 대도시 사람들이 그러하듯 팍팍한 인상이었는데. 지금 여기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은 모두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새삼 놀랍다. 그게 이 도시에 이렇게나 큰 공원이 존재하는 이유겠지.
우리는 한 돗자리에 앉아 각자 이어폰을 끼고 다른 음악을 들으며, 따로 또 같이 있었다. 친구는 지금 이 순간과 잘 어울리는 음악을 각자 선곡해서 '센트럴파크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나중에 그 노래들을 찾아 들었을 때,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느꼈던 어느 봄날의 행복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기를 바라며.
아쉽게도 그 자리에서 바로 공동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나의 셔플 버튼이 멈춰 섰던 노래들은 메모장에 따로 기록해놨다. 대부분 신나고 청량한 노래였는데, 그중에서도 (당시 미발매곡이었어서 라이브 직캠 음원을 추출해서 들었던) 백예린의 'Square'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때로는 멍하니 풍경을 감상하거나 사람들을 관찰하고, 또 때로는 지금 이 순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을 찾아내기 위해 몰두하고 몰입했다. 이 빠듯한 여행 일정 중 두 시간 가까이를 사실상 그냥 앉아만 있었던 거다. 근데 그게 참 좋았다.
센트럴파크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아니, 아무것도 안 할수록 그곳의 바이브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일 테다. 여행 딱 중간쯤 되는 일정에 이렇게 잠깐 마음 편히 쉬어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다행이다. '이 여유를 잃지 말자'는 말을 자꾸 되뇌었다. 그 말을 하도 생각했더니 속으로만 했는지, 친구에게도 말했는지, 아니면 친구가 해준 말인지는 헷갈리지만. 아무튼 소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