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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 싫어하는 사람은
소호에서 뭐하나

Day 3. 소호 - NYU - 노리타

by 이리터

아침에 숙소를 나서는 길에 카톡으로 충격적인 뉴스를 받아서 '헉'하고 얼어붙었다. 보통 사람들은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는 가십거리지만, 나의 업무 특성상 자세히 알아야 하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이런 게 너무 스트레스라고 한탄하고, 그래도 지금 휴가 와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더니 돌아오는 친구의 한 마디. "그런 거 안 보니까 세상에 볼 게 얼마나 많아"


맞아. 뉴욕에 와보니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 이곳에서 마주한 신선한 충격들을 다 담아가기에도 나의 시간과 기억력은 부족한데, 절대 낭비할 수 없다. 한국의 소식은 잠시 꺼두기로 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소식에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되는 건 여행자의 특권이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공원은 다름 아닌 뉴욕시청이었다. 서울 시청 앞 광장에 비해서는 아담하지만 훨씬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었다. 이렇게 우연히 지나친 뜻밖의 장소도 아름다운 걸 보면 오늘 여행도 좋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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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Hall Park

명품 매장과 편집샵이 줄지어 있는 패션 디스트릭트 '쇼핑 천국' 소호에 왔다. 사실 나는 쇼핑을 싫어한다. 매장을 쓱 한 번 둘러만 봐도 살 만한 물건이 있나 금방 파악되는데 그 안에 몇 시간 씩 있는 걸 못 버티겠고. 명품에는 전혀 관심도 없을뿐더러 과도한 소비를 조장하는 일부 패션 업계의 마케팅에는 반감이 들 정도다.


그런 내가 소호에 왔다. 굳이 여행이 아니었다면 하지 않았을 경험, 흥미는 없지만 특별한 문화 체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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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O

패션 디스트릭트라서 그런지 확실히 트렌디한 느낌은 있다. 이 거리의 사람들은 두 부류로 보인다. 대충 아무거나 걸쳐도 눈에 띄는 찐 멋쟁이거나 아니면 여기 다 쓸어갈 각오로 쇼핑하러 온 여행객이거나. 둘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나는 잠시 친구와 떨어져서 각자의 방식으로 소호를 즐겨보기로 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곳은 아마존 4 스타. 아마존에서 평점이 4/5 이상인 제품만 모아놓은 매장으로, 제품마다 온라인상의 평점과 사용자의 리뷰를 달아놓은 것이 다른 일반 매장과의 차별점이다. 책부터 가전제품까지 다 한데 모아놔서 정말 여기 쇼핑하러 오는 사람이 있을까는 의문이었지만, 직접 제품 실물을 볼 수 없는 온라인 커머스의 한계를 나름 해결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나갈 때 매장 경험을 간단한 버튼으로 평가해달라는 기계가 인상적이었다. 역시 아마존의 최대 자산은 유저들의 피드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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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on 4-star

사람들로 북적이는 소호 메인 거리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해 좀 더 한산한 옆 블록으로 피신했다. 이쪽에 오니 훨씬 마음이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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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더워서 갈증이 난다. 시원한 커피 한 잔이 간절해서 찾아간 카페는 미국 동북부 지역에서 유명한 커피 프랜차이즈 La Colombe. 브랜드를 상징하는 비둘기 로고와 아트월이 꽤나 감각적이었고, 특히 거울에 맞은편 건물이 반사되어 하나의 그림으로 보이는 효과는 신의 한 수였다. 작은 매장인데도 아주 쾌적하게 에어컨 바람 쐬며 시원하게 쉬다 갈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곳. 아이스 아메리카노 맛도 더할 나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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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Colombe Coffee Roasters

시민들에게 기증받은 중고 도서를 잘 관리하고 큐레이션 하여 판매하고, 수익금은 에이즈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는 서점 겸 북카페 하우징웍스. 이렇게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유럽의 어느 서점에서나 풍길 법한 고풍스러운 멋도 있다. 공간도 멋진데 그냥 버려질 뻔했던 책에게 새 생명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또 좋은 일을 위해 힘쓴다니,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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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ing Works Bookstore Cafe & Bar

그 옆에 있는 하우징웍스의 thrift shop, 각종 중고 물건을 파는 매장이다. 다시 한번 느꼈지만 미국 사람들은 남이 쓰던 물건에 대한 거부감이 정말 없는 편이다. 여기서 엄청 특이하게 생긴 노란색 카메라를 발견했다. 모델명을 검색해보니 빈티지 수중 카메라란다. 실제 작동하는 건지, 어떻게 쓰는 건지도 모르지만 장식용으로 둬도 괜찮을 것 같아 8달러를 주고 데려왔다. 완벽한 내 취향의 물건을 여행 기념품으로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IMG_3364.jpg Housing Works Thrift Shops

소호에서 산 거라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중고 카메라뿐. 그 흔한 옷이나 액세서리도 하나 안 샀지만 아깝지 않은 구경이었다. 나는 소호는 이 정도로 충분한 것 같으니, 잠깐 옆 동네도 한번 둘러보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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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근처에 뉴욕대학교 NYU가 있다. 캠퍼스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그냥 길가에 있는 건물이 다 대학 건물인 건 좀 낯설다. NYU 경영대인 스턴은 대학생 시절 교환학생으로 지원해볼까 하다가 '어차피 안 되겠지', '만약 붙어도 뉴욕 생활비를 어떻게 감당해' 등의 쓸데없는 걱정으로 결국 포기했던 학교이기도 하다. 만약 그때의 내가 이곳에 왔다면, 어쩌면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20대의 인생을 보내고 있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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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York University

요즘 NYU 학생들 사이에서 핫한 디저트 맛집이라고 SNS에서 보고 기대가 컸던 곳. 쿠키 도우, 말 그대로 쿠키 반죽을 먹을 수 있게 만들어서 아이스크림 전문점처럼 판다. 어렸을 때 최애 아이스크림이 쿠키 도우 맛이었던 추억이 있어서 이건 정말 획기적인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근데 신기하긴 한데, 인간적으로 너무 달고 식감도 생소해서 결국 먹다가 반은 버리고 나왔다. 쿠키는 구워서 먹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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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Ō, Cookie Dough Confections




소호로 돌아와 쇼핑을 마친 친구를 만났다. 사고 싶었던 건 좀 더 고민해보고 나중에 사겠다고 한다. 소호에서 쇼핑하기도 쉽지는 않은 듯하다. 그럼 이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여길 떠나자.


지나가다가 특이하게 생겼길래 호기심에 한번 들어가 본 곳. 들어가서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이게 뭔지 한참을 어리둥절해한 끝에 라이스 푸딩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직원이 한번 맛보라길래 피치 망고 맛을 골라 테이스팅 해봤는데 이거 진짜 맛있다. 타이밍이 애매해서 나중에 지나가다 또 이 가게를 보면 꼭 사 먹자고 했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이 가게를 못 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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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e to Riches

이걸 먹기 위해 참았다. grilled corn, 일명 마약 옥수수로 유명한 카페 하바나. 7년 전에 뉴욕에 왔을 때도 먹어봤고, 이제는 한국에서도 쉽게 맛볼 수 있는 음식이지만 아는 맛이 더 무섭다. 치즈 가루가 푹푹 떨어지는 옥수수를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이건 딱 맥주각이었다. 동전을 탈탈 털어 사온 코로나 맥주를 곁들이니 지금 여기가 바로 쿠바 아바나 한복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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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é Habana

아침에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새파랗던 하늘이었는데, 오후가 되니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아쉽긴 했지만 지금 여기 노리타의 힙한 동네 분위기와는 제법 잘 어울리는 날씨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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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lita

이제 짐을 찾아서 미드타운에 있는 숙소로 옮기러 간다. 드디어 뉴욕 여행 3일 차 만에 맨해튼 중심부로 올라가서 타임스퀘어와 야경을 보게 된다. 뉴욕에 있는데도 뉴욕에 간다는 생각에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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