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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에서 데려온
'예쁜 쓰레기'들의 사연

Day 2.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by 이리터

뉴욕에서의 둘째 날이자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는 오늘은 강 건너 브루클린으로 간다. 서울에서도 2호선이나 7호선 타고 한강을 건널 때면 늘 감탄하며 창밖 풍경을 찍는 습관이 있는데. 뉴욕에 와서 이스트 리버를 건너는 동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브루클린 땅을 밟기도 전에 지하철에서부터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설렜다. 마치 파노라마 영화 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달까. 날씨도 환상적이었고.

두근두근

윌리엄스버그에 내리자마자 본 풍경. 나는 분명 이 동네와 잘 맞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빨리 온 구석구석을 샅샅이 쏘다니며 이곳과 친해지고 싶었다.

첫눈에 반해버렸다

역시나 곳곳에 그라피티가 눈에 띈다. 좀 크리피하기도 하지만 마냥 무섭지만은 않고, 나름 센스 있고 위트 있는 메시지도 보인다. 그리고 그런 배경과 참 잘 어우러지던 이곳 주민들의 느슨한 일상. 모든 게 다 크고 높고 빠른 맨해튼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여유가 느껴진다. 토요일 주말 아침인 만큼, 반려견과 동네에서 산책을 즐기거나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야외에서 브런치를 즐기는 모습이다.

흔한 주말 아침 풍경

윌리엄스버그의 주말 아침 바이브에 취해 커피 한 잔이 간절해졌다. 즉흥적으로 정한 우리의 첫 목적지는 개인적으로 가장 가보고 싶었던 카페였던 'Devoción'.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실내인데도 층고가 높고 채광이 좋아서 탁 트인 공간감이 느껴졌고, 그 안에 무성하게 자란 나무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활기를 불어넣었다. 노란색 포인트, 자연광, 플랜테리어, 친환경 커피, 빈티지 가구. 정말이지 내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를 다 갖춘 완벽한 카페. 이런 카페가 꿈이 아니라 동네에 있다니, 질투 난다.

Devoción




점심으로 피터 루거 스테이크를 먹을 계획이었는데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우선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두고 나왔다. 마침 근처에 윌리엄스버그 브릿지에 올라가는 길이 있길래 바람 쐴 겸 좀 걷기로 했다.


윌리엄스버그 브릿지는 이 동네 주민들이 사랑하는 조깅 코스인가 보다. 친구랑 '지금 우리 나이키 CF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하고 웃었을 정도로, 이 다리 위에는 뛰거나 자전거 타거나 보드 타며 달리는 사람들뿐이었다. 자유분방한 운동복 패션에 흠칫하기도 했는데, 이 시원한 강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달리는 기분은 얼마나 상쾌할까 생각하면 조금 부러웠다. 뉴요커들을 특별한 이유 없이 동경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남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만 집중하며 운동하는 모습이 멋져 보인 건 사실이다.

Williamsburg Bridge

게다가 이런 도시 뷰를 배경으로! 브루클린에 사는 직장인이라면 맨해튼에서 쌓은 스트레스는 몽땅 강물에 던져 날려버리고 세상 가뿐한 마음으로 집으로 건너올 수 있겠다.

그리고 존버 끝에 영접한 그 유명한 피터 루거 스테이크.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뭐 고기니까 당연히 맛있긴 한데, 입에서 사르르 녹는다거나 태어나 처음 먹어본 맛이라든가 그런 건 아니었다. 샐러드나 사이드 디쉬 없이 오직 고기만 먹는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남기기 아까워서 질릴 때까지 다 먹긴 했는데, 고작 여행 2일 차에 이제 뉴욕에서 고기 그만 먹어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Peter Luger Steak House
계산할 때 초콜릿 주는 센스




하루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돌아다녀본 게 전부지만, 확실히 뉴욕의 다른 동네와 차별화되는 브루클린의 매력이 있는 건 알겠다.

하나, 브루클린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뉴욕이라는 이름보다 더 자랑스러워한다. 뉴욕에 있는 대부분의 지역이 'I♡NY' 같은 사인으로 뉴욕이라는 큰 이름을 강조하는데, 브루클린에서는 오히려 뉴욕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네임 밸류에 편승하지 않으려는 혹은 편승하기를 거부하는, 로컬 사회의 개성을 지키려는 의지로 느껴졌다.

둘, 어딜 가든 메시지가 넘쳐난다. 대기업 자본이 투자된 거대한 광고판에도, 소박한 소매점 간판에도, 하다 못해 길거리 낙서에도, 어디에서 무엇을 봐도 울림을 주는 메시지 투성이다. 이곳의 문장들은 별로 길지도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담백하게 감동을 준다. 같은 문구를 맨해튼 한복판에서 봤어도 과연 같은 느낌을 받았을까.

셋, 이 동네는 알고 보면 보석을 채굴하는 광산일지도 모른다. 보석만큼이나 신기하고 멋진 물건들이 이곳에 넘쳐난다. 다른 동네 편집샵에서 번지르르하게 비싸게 팔 만한 것들을 그냥 길바닥에 쌓아놓고 판다. 특히 그런 샵들이 줄지어 있는 베드포드 애비뉴는 개미지옥이니 지갑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Bedford Ave의 상점들




브루클린을 반드시 주말 일정으로 잡아야 했던 이유, 바로 플리마켓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토요일과 일요일 딱 이틀만 여는 윌리엄스버그의 '아티스트&플리'에는 수많은 아티스트와 메이커들이 몰려든다. 주로 수공예품이나 아기자기한 액세서리 류가 많았고, 셀러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물건에 자부심과 애정이 넘쳐 보였다. 말 그대로 'discover goods that tell a story'.

Artists&Fleas

윌리엄스버그 호텔의 창고 같은 데서 열리는 토요일의 '브루클린 플리'에서는 세월의 흔적이 제대로 묻어나는 '찐 빈티지'를 발굴할 수 있었다. 정말 별의별 게 다 있다. 이런 걸 어디에 쓰나 싶은 장난감, 할머니의 할머니가 입었을 법한 옷, 손 대면 바로 찢어질 것 같은 오래된 잡지, 장식용으로는 훌륭하지만 작동은 전혀 안 될 것 같은 필름 카메라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주 제대로 빠져서 구경했다. 뉴욕의 동묘 시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Brooklyn Flea

그 결과 오늘의 수확. 옛날 신문 지면 광고 스크랩으로 만든 빈티지 포스터 3종, 필름 카메라, 핀뱃지 9개, 빈티지 껌 박스 2통, LP로 만든 팔찌 3개, 그리고 아티스트&플리에서 공짜로 득템한 에코백까지. 숙소 와서 쫙 펼쳐 놓고 보니 하나하나 다 마음에 들고, 보기만 해도 뿌듯해서 광대가 자꾸만 올라가더라.


단순히 이것들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만족감을 넘어서, 각 물건들이 지닌 의미, 그들과 내가 만난 배경이 되어준 브루클린의 분위기, 그리고 내가 이 작은 것들을 골라 데려가기로 마음먹은 이유까지. 이 모든 게 모여 만들어 낸 하나의 커다란 서사가 나에게로 왔다는 충만함이 느껴졌다.

탕진잼

모든 이에게 각자만의 사연이 있듯이, 모든 사물에도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고 믿는다. 누가 왜 무엇을 위하여 만들었는지, 또 그 이후에 누가 왜 어떻게 그 물건을 사용했는지에 따라 물건이 지닌 역사가 차곡차곡 쌓인다. 메이커를 직접 만날 수 있는 수공예품 플리마켓을 좋아하는 이유, 또 오래된 물건 더미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는 빈티지 마켓과 thrift shop을 찾는 이유.


'goods that tell a story', 이런 '사연 있는 예쁜 쓰레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말의 브루클린이란 마치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 '예쁜 쓰레기'란 본래 '보기에는 좋지만 쓸모없는 물건'이라는 뜻의 신조어지만, 점차 긍정적인 어감으로 바뀌어 '딱히 필요하진 않지만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예쁜 쓰레기'를 사랑하고, 모든 창작자를 존중한다. 표현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덧붙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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