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 월스트리트 - 배터리 파크
사실 로워 맨해튼은 단조롭고 칙칙할 거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꽤 발랄하고 컬러풀했달까. 곳곳에 눈을 확 사로잡는 특이한 조형물이 있어 목적 없이 걸어 다니며 구경하기에 마냥 지루하기만 한 동네는 아니었다.
그러다 결국 월스트리트까지 와버렸다. 금융알못이라 딱히 흥미도 없고, 예전에도 가본 적은 있어 그냥 좁은 거리가 전부인 걸 알면서도 결국 또 왔다. 그래도 나름 세계 금융의 중심지라고 하니, 이곳에 와봤다는 증거를 남기려 열심히 셔터를 눌러본다. 다소 삭막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런 면도 확실히 '뉴욕'하면 떠오르는 단면 중 하나다.
그리고 지나가다 본 그 유명한 황소상. 소의 중요 부위를 만지며 소원을 빌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다. 소 엉덩이 뒤로 관광객들이 사진 찍으려고 줄을 섰다. 다행히도 나는 그런 속설에도 흥미가 없어서 쿨하게 패스했다. 감정도 목숨도 없는 그냥 큰 동상일 뿐인데, 쉴 틈 없이 혹사당하는 황소가 사실 조금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게 더 재미있더라. 길 한복판에 누워 요염한 포즈로 구걸하는 homeless 트럼프.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삭막해 보이던 맨해튼 도심에서도 심심치 않게 작은 공원을 발견할 수 있다. 회색 빌딩 숲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싱그러운 풀냄새를 맡고 시원한 분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가면 아주 제대로 된 공원, 맨해튼 최남단의 배터리 파크가 나온다. 많이들 잔디밭에 자리 잡고 앉아 수다를 떨거나 피크닉을 즐기는 등 이 날씨가 선사하는 여유를 누리고 있었다.
공원 안에 있는 미국식 푸드 카트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초딩 때 쿼터 동전 생기면 엄마 몰래 주머니에 넣어놨다가 저런 데 가서 스노우콘 사 먹곤 했는데.. 마치 그 시절 엄마 아빠 손 잡고 유원지에 놀러 간 것처럼 들떠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바다를 보고 싶어 여기까지 왔다. 사실 바다는 아니고 허드슨 강과 이스트 강이 만나는 지점인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바닷가에 와있는 듯한 기분은 제법 났다. 답답했던 가슴이 탁 트이는 해방감이 느껴진다. 이런 기분을 느끼려 여행 왔지.
관광객들이 탄 페리가 지나다니고, 저 멀리 삐죽 솟은 자유의 여신상도 보인다. 페리 타고 리버티 스테이트 파크나 엘리스 아일랜드 건너가서 바라보는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이 또 장관이라는데. 왠지 이번 여행에서는 거기까지 깔 일정은 못될 것 같지만, 저기서 지금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본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 쉬다가 우연히 본 장면. 웨딩 사진을 찍으러 가는 신랑 신부와 예쁜 드레스를 맞춰 입은 신부 들러리 친구들. 하나같이 들떠있는 표정으로 까르르 웃으면서 지나가는데, 마치 지금 내가 할리우드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줄 알았잖아. 다들 행복하구나~
저녁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친구를 만나러 슬슬 숙소로 돌아가 보려 한다. 혼자 한 세 시간 남짓 돌아다녔나. 이 정도면 생각보다 알차게 로워 맨해튼을 구경했다. 그동안 친구는 뉴욕의 어떤 모습들을 보고 왔을지 궁금하다.
친구를 만나 저녁 메뉴를 고민하다가 근처에 있는 쉑쉑에 들어갔다. 뉴욕에서의 첫 식사로 쉑쉑버거라니, 정말 뻔한 선택이었지만, 헤비하지 않으면서도 미쿡맛을 찐하게 느껴볼 수 있는 적절한 메뉴였다고 생각한다. 맛은 뭐.. 한국과 큰 차이 없다. 캐러멜 밀크셰이크랑 같이 먹으면 뭔들 맛있다. 아주 제대로 살 찌는 맛.
첫날인 만큼 간단히 먹고 남은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구경하자는 마음이었다. 오후에 혼자 돌아다녔던 월드트레이드센터, 9/11 메모리얼, 월스트리트, 배터리 파크까지 친구와 다시 한 번씩 가봤다. 고작 몇 시간 먼저 다 가봤다고 나는 시시콜콜 아는 척을 해댔다.
배터리 파크까지 다시 온 덕분에 바다 위로 노을 지는 야경을 볼 수 있었다. 얕게 뜬 구름에 노을이 물감 섞이듯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꽤 로맨틱했다. 낮에는 그냥 삐죽 튀어나온 조형물에 불과해 보였던 자유의 여신상이 이제 우리가 아는 그 에메랄드 빛깔로 빛나기 시작한다. 유명한 랜드마크에 큰 감흥은 없는 우리라, 이렇게 먼발치서 보는 걸로 자유의 여신상은 봤다 치기로 했다.
반나절 동안 배터리 파크까지 왕복 네 번을 걸어 다녔으니 다리가 아플만했다. 낮에 미국에 도착해서 아직 씻지도 못한 피곤한 몸이라, 이쯤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래도 여행 첫날밤인데 한 잔 해야지. 체크인할 때 준 음료 쿠폰으로 간단히 호텔에 있는 바에서 공짜 칵테일을 마셨다. 입에 썩 맞지는 않았던 자몽맛 술을 홀짝홀짝 비우다 눈앞에 있는 네온사인에 눈이 갔다.
'Good Times Bad Times' 심플하면서도 담백한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우리 인생에는 당연히 좋은 순간도 있고 안 좋은 순간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제 막 시작된 우리의 여행에는 좋은 순간이 더 많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