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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브릿지가 이어주는
뉴욕의 갭 차이

Day 2. 윌리엄스버그 - 덤보 - 브루클린 브릿지

by 이리터

브루클린에서 기대했던 또 한 가지, 브루클린 브루어리에서 양조된 싱싱한 브루클린 라거를 바로 드래프트로 마셔보는 것이다. 플리마켓이 열렸던 윌리엄스버그 호텔 바로 옆 블록에 이런 문구가 쓰인 벽을 찾으면 된다. 맥주 덕후 가슴 떨리게 만드는 문구 앞에서 인증샷도 잔뜩 남겼다.

역시 천조국답게 로컬 브루어리인데도 규모가 꽤 크더라. 안 그래도 날이 더웠는데 맥주를 보니 갑자기 미친 듯이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건 물로 채워질 갈증이 아니었다. 오직 시원하고 청량한 맥주만이 해소할 수 있는, 타는 목마름이었다. 메뉴판에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맥주가 있는데, 마침 대표 메뉴인 그냥 라거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엠버 라거 스타일이라 고민 없이 주문했다. 맛은 말해 뭐해, 이것은 '찐'의 맛이다.

라거 한 잔 주세요

여기 분위기가 또 꽤나 인상적이었다. 주말이라 대낮에도 빈자리가 거의 없이 시끌벅적했는데, 그냥 삼삼오오 모여 마시는 호프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공간에 가까워 보였다. 젠가나 보드게임을 하는 테이블도 많았고, 또 어떤 테이블에서는 이 소음 속에서 책을 읽기도 한다. 맥주 한 잔 시켜놓고 가볍게 여가시간을 보내는 곳인가 보다. 술집이 아닌 곳에서 마시는 술을 즐기는 나는 이런 분위기가 마냥 부럽다. 서울에도 이런 자유분방함 속에서 낮에도 부담 없이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펍 문화가 자리 잡으면 얼마나 좋을까.

Brooklyn Brewery

알쓰 친구가 남긴 맥주까지 대신 클리어. 1도 안 취했지만 기분만은 들떴다. 이제 윌리엄스버그를 떠나 브루클린 브릿지를 보러 가는 길. 지하철역까지 가는 짧은 거리에도 아트가 넘쳐난다.

Nassau Avenue




시간을 딱 맞춰왔다. 해 질 무렵 노을 속에서 브루클린 브릿지를 건너 숙소로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타이밍이 완벽하다. 본격적으로 다리 위를 건너기 전에 잠깐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모든 관광객들이 인증샷을 찍으려고 굳이 찾아오는 덤보의 한 골목길.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죽하면 '덤보(DUMBO)'라는 이 동네의 명칭도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 말 그대로 맨해튼 브릿지 아래라는 뜻일까.


웅장한 맨해튼 브릿지가 가까이서 보이는 건 장관이었지만, 차도 많고 사람도 너무 많아서 마음에 드는 멋진 사진을 찍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큰 다리는 다른 데서도 잘 보일 텐데, 그 많고 많은 곳 중 왜 하필 이 골목이 이렇게까지 유명한 포토스팟이 될 일인가 싶었다. 그리고 아쉬운 사진만 수십 장 찍고 돌아서는 길에 든 생각. 양 옆에서 대칭을 이루는 갈색 건물이 이 그림을 위한 훌륭한 배경이 되어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가운데서 맨해튼 브릿지가 가장 빛나는 주인공이 될 수 있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몰입 효과.

DUMBO

드디어 브루클린을 뒤로하고 맨해튼으로 향한다. 지금 걷는 이 다리 끝에는 크고 화려한 빌딩 숲이 펼쳐져 있다. 오늘 하루종일 봐온 것 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감탄하며 그곳을 향해 걸어간다. 이 길의 시작점도 분명 지리적으로는 뉴욕이었을 테지만, 이 길을 통해 비로소 '관념 속의 뉴욕'으로 들어가는 듯 했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가히 대단한 뷰였다.

Brooklyn Bridge

해 질 무렵에 시간 맞춰 오길 참 잘했다. 그냥 봐도 충분히 멋있는 풍경이지만, 노을이 지면서 시시각각으로 물들어가는 도시의 색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푸른 끼가 약간 도는 회색 배경 사이로 주황색 띠가 생기더니, 자연스럽게 섞이면서 짙은 푸른색으로 변한다. 슬슬 어두워지니 하나둘 조명이 켜지고, 검은 어둠과 노란 불빛의 향연이 시작된다. CG가 아주 화려한 영화를 4DX 파노라마로 보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1분 마다 변하는 도시의 색

더 보지 못해 아쉽다는 생각은 보통 떠난 뒤 한참 후에 들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브루클린 브릿지를 걸으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계속 들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건 참 예쁜데 몸으로 느껴지는 것들은 결코 예쁘지 않았다. 해가 지니 강바람이 매섭게 얼굴을 할퀴어 왔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리저리 치이느라 정신없었다. 그리고 이 엄청난 풍경을 눈에 못 담고 사진에 집착하는 내가 싫었다. 그걸 알면서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고.

블루아워, 가장 예뻤던 시간대

한 시간 넘게 다리 위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걸었으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녹초가 되어버렸다. 이제 더 멋진 야경을 담고 싶은 욕심보다도, 어서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존 욕구가 더 강하게 들었다. 몸을 따끈하게 녹여줄 만한 차나 국물을 마시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쳐버린 우리는 말없이 숙소로 걸어갔다.




따뜻한 숙소에 들어와 오늘 사 온 물건들을 하나하나 다시 꺼내보며 만족스러워하고, 오늘 건진 멋진 사진들을 복습하며 뿌듯해해도, 계속 마음 한 구석이 허했다. 점심에 스테이크를 질리도록 먹어서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역시 이대로 하루를 마무리하기에는 아쉬웠던 거다.


근처에서 가볍게 한 잔 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다가 친구가 찾아낸 기가 막힌 곳. 바로 옆에 있는 호텔 안에 있는 바, 세상 직관적인 이름의 'The Bar Room'이라는 곳이다. 예상치 못하게 5성급 호텔 로비를 통해 들어왔는데 그 의리의리함에 당황했고, 내부 분위기도 기대 이상이라 놀랐다. 즉흥으로 찾은 곳까지 이렇게 완벽하다고?

The Bar Room

한쪽 벽면에 엔티크한 책장이 쭉 진열되어 있고 테이블마다 멋진 램프가 놓여있어서 그런지, 꼭 도서관이나 박물관에서 술을 마시는 듯한 경건한 느낌도 들었다. 우리는 이런 분위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까 브루클린 브루어리에서 웃고 떠들며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는데, 맨해튼 다운타운의 바에서는 조곤조곤 오늘 하루에 대한 감상을 나누며 칵테일은 혀 끝에만 닿을 정도로 홀짝이게 된다.

IMG_3122 2.jpg

맨해튼으로 넘어와서 전환된 분위기가 낯설면서도 신기하다. 분명 오늘 낮에 힙하고 자유분방한 도시를 누볐는데, 밤에는 이렇게 고상하고 차분한 곳에서 마무리한다. 다리 하나 건넜을 뿐인데 다른 매력의 두 도시를 여행하는 기분. 브루클린 브릿지의 양끝에서 만난 뉴욕의 갭 차이에 거하게 치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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