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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내고 뉴욕까지 와서
출근이라니

Day 5. UN 본부 - 플랫아이언 - 에이스 호텔

by 이리터

오늘 밖에 나갈 준비를 하는 마음가짐은 다른 날들과는 사뭇 달랐다. 뉴욕 와서 줄곧 편한 티셔츠에 운동화, 선글라스 차림이었는데 모처럼 점잖은 원피스에 카디건을 걸쳤다. 괜히 화장도 좀 더 꼼꼼히 하게 되고, 오직 이 날만을 위해 따로 챙겨 온 구두도 꺼내 신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휴가 와서 이렇게까지 내 몸에 격식 차리는 건 생각해보니 처음이었다. 조금 차려입었을 뿐인데 여행자 신분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오전에 UN 본부 투어를 예약해뒀기 때문이다. 투어는 10시 시작이었지만 입장 전에 수속을 밟는 데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여 9시까지 도착한다는 생각으로 갔다. 뉴욕에서 가장 큰 역이라는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에서 내려서 쭉 걸어가야지 했는데 세상에.. 사람이 너무 많다. 한눈팔다가는 다치겠다 싶을 정도로 사람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마침 딱 평일 출근 시간대였던 것이다. 이건 예상 못한 그림인데.

IMG_4640.jpg 맨해튼의 어느 출근길

출근길 부대에 휩쓸려 42번가를 걸으면서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빌딩을 올려다보면 모두가 알 만한 세계적인 기업의 간판이 붙어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제법 비장해 보였다. 바로 여기가 세계 비즈니스의 중심이고 이들이 큰 물에서 노는 사람들이겠구나 싶었다. 그만큼 실력이 뛰어나거나, 재능이 있거나, 혹은 패기가 넘치거나. 어떤 방면으로든 다들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일 테다. 그들은 좀 더 큰 세상을 갈망해오던 내 마음속 불씨에 화르륵 기름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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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도착한 UN 본부. 지금 내 앞에 걸어가는 사람들은 출근하는 UN 직원들이겠지. 진짜 전세계를 위해 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보니, 입구로 못 따라 들어가고 방문자 센터로 향하는 나는 조금 작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방문객 인파 사이에서 한참 줄을 서서 여권 검사를 받고, 사진도 찍고, 짐 검사도 하고 나니 정말 금방 한 시간이 지났다. 꼭 공항에서 출국 수속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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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투어를 신청한 덕분에 모든 내용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고 궁금한 게 생기면 부담 없이 질문할 수도 있어서 좋았다. 운 좋게 이 날 진행된 회의가 없어서 외부인에 허락된 모든 회의실에 다 들어가 볼 수 있었는데, 그중 첫 번째로 본 신탁통치 이사회 회의장은 보자마자 '여기 거기잖아!' 하는 느낌이 왔다. 방탄소년단이 'Speak Yourself' 스피치 했던 곳. 일산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김남준씨, 새삼 대단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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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Nations Headquarters

사실 세계 평화, 정치, 경제 같은 큰 이야기는 내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다. 타임스퀘어 전광판 같은 걸 더 좋아하는 천상 경영학과+신문방송학과st 인간이라, UN본부 투어는 '내가 이런 데도 와봤구나' 정도의 임팩트였는데.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친구는 옆에서 생각이 많아 보였다. 분명 나보다는 훨씬 더 큰 울림을 느꼈을 테다.


나에게 뜻밖의 자극을 준 건 투어를 이끌어준 한국인 가이드였다. 내 또래 정도 되어 보였는데 UN을 대표해 소개한다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당당한 애티튜드가 돋보였다. 동료 직원들과 즉석에서 상황을 조율할 때 엄청 프로페셔널해 보이기도 했고. 나만 그녀가 멋지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는지, 대학생 같아 보였던 관광객들은 그녀에게 어떻게 UN에 입사하셨냐, 미국에서 공부하셨냐, 뭘 준비하셨냐 등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젊은 나이에 그녀는 이미 누군가에게 롤모델 같은 존재가 된 셈이다.

IMG_4723.jpg 그녀가 가장 힘주어 설명했던(?) UN 인권선언




투어를 마치고 밖에 나와보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빗속을 뚫고 또 열심히 걸었다. 오늘 점심은 특별히 레스토랑을 미리 예약해뒀기 때문이다. 뉴욕에 왔으니 한번쯤 파인 다이닝을 경험해보자고 친구가 알아본 곳이다. 사실 나는 이곳에 대한 사전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였는데 들어서자마자 풍기는 사랑스러운 분위기에 홀딱 반해버렸다. 상냥한 종업원들의 응대에 기분 좋아지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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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uley at Home

엄청난 최상급 레스토랑은 아니고, 한 끼를 투자한다고 생각했을 때 어느 정도 affordable한 선에서 선택한 곳이라고 하는데, 파인 다이닝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 나로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식사 경험이었다. 애피타이저부터 메인, 디저트까지 총 5코스로 호화로운 식사를 했는데 그중 베스트는 'oyster with lemon cloud'라는 설명이 붙은 애피타이저 굴 요리였다. 굴을 싫어하는 편인데 위에 올려져 있는 레몬 폼이 굴의 비린 맛을 잡아주면서 꿀떡꿀떡 넘어가게 한다. 상큼한 굴이라니,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본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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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피타이저 2 - 메인 1 - 디저트 2

한 끼 식사 값으로 내 생애 가장 큰 금액을 긁고 나왔다. 쥐도 새도 모르게 차지가 붙어버린 물과 커피 값이 조금 괘씸하긴 했지만 어쨌든 기분 좋으니 용서된다. 맛있는 거 먹고 flex하니 기분이 짜릿했다. 역시 돈이 최고네.


금방이라도 배가 터질 것 같아 좀 걷기로 했다. 다행히 식사를 마치고 나와보니 비는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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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가장 상징적인 랜드마크 중 하나인 플랫 아이언 빌딩. 어떻게 이런 틈새의 땅에도 건물을 지을 생각을 했는지 신기하다. 조금의 땅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의지, 거기에 보란 듯이 지어 놓은 가장 개성 넘치는 건축물. 마침 그 앞으로 노란 NYC 택시가 지나갈 때 사진을 찍었는데, 가장 뉴욕스러운 장면을 포착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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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tiron Building / Madison Square Park




걷다가 여기까지 와버렸다. 매거진 B 에이스 호텔 편을 읽은 후로 에이스 호텔이 있는 도시를 여행할 때면 꼭 한 번씩 방문해본다. 포틀랜드, 시애틀, 런던 쇼디치 지점에 이어 네 번째로 발도장을 찍은 뉴욕점. 여기 로비는 캐주얼하고 편안한 거실 같던 다른 지점 로비에 비해 유독 어둡고 시크한 느낌이 풍겼다. 대낮에도 이렇게 암흑 같고 차분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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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e Hotel

도서관과 바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분위기다. 이 호텔에 숙박하는 게스트든 아니면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든, 로비에 편하게 모여 각자 자기 할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언제든 누구든 환영하는 이런 공간이 근처에 있다는 게 부러웠다. 나도 맥북만 있었다면 여기 자리 잡고 앉아서 낮술 한 잔 하면서 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IMG_4948.jpg Stumptown Coffee Roasters

술 대신 최근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인 스텀프타운 커피를 한 잔 샀다. 친구는 다른 곳에 볼 일이 있어 먼저 떠났고, 나는 로비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남은 오후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고민했다. 배부르고 피곤하니 그냥 여기 눌러앉고 싶기도 한데, 원피스 입은 게 아까워서 어디든 가서 뭐라도 하나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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