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플랫아이언 - 유니언 스퀘어 - 그리니치 빌리지
계획에 없던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져도 나는 절대 당황하지 않지.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구글 지도에 잔뜩 표시해뒀기 때문에, 별표로 가득한 나의 지도를 따라 걷다 보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에이스 호텔에서 출발해 브로드웨이를 따라 유니언 스퀘어를 향해 걸어가면서 재미있어 보이는 가게들을 슬쩍 구경해보기로 했다.
첫 번째 스탑은 리졸리 북스토어 (Rizzoli Bookstore). 전통 깊은 부잣집에 있을 법한 거대한 책장 때문에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주로 예술 서적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나의 시선을 강탈해버린 책이 하나 있었으니. 무려 처음부터 끝까지 이모지 혹은 픽토그램으로만 되어있는 책이었다. 글자 하나 없이 부호만으로 의미를 전달하고 한 권 분량의 책을 구성할 수 있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터라 말 그대로 문화충격.
익숙한 사인에 이끌려 들어간 위워크 나우 (WeWork Now). 일반적인 위워크와는 달리 모두에게 열린 공간을 지향하는 것 같았다. 위워크의 정체성을 담은 제품을 파는 샵과 카페도 겸하고 있고. 아마 일정 이용료를 내면 누구든 단 몇 시간만이든, 안에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를 이용할 수 있을 듯하다. 정확히 뭐하는 덴지는 몰라도, 공간 자체에서 느껴지는 젊고 트렌디한 기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던 곳.
디쉬웨어 브랜드로 알려져 있는 주방용품 잡화점 피쉬스 에디 (Fishs Eddy). 솔직히 세상에 있는 모든 접시류는 딱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질색팔색 하는 꽃무늬 거나, 아니면 아예 민무늬 단색이거나. 그런데 이곳의 식기류는 특이한 디자인과 위트 있는 문구로 통통 튀는 제품이 많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이런 거 볼 수 있지만 좀 더 미국식 유-우머랄까.
예를 들면 이런 거. 전 대통령 얼굴이 박혀있는 술잔과 현 대통령 얼굴이 정성껏 프린트되어있는 화장실 휴지 ㅋㅋㅋ 미국의 정치 풍자 클라스는 봐도 봐도 적응 안 된다.
여행 가면 꼭 그 도시의 유명한 서점을 찾아가 구경해보는 편이다. 그 서점에 대한 인상으로 그 도시를 기억하는 경우도 많다. 사실상 이 날 오후의 최종 목적지였던 스트랜드 북스토어 (Strand Book Store), 뉴욕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중고서점으로 유명한 곳이다. 스트랜드는 정말 크고 잡다하고 볼거리가 많았다. 뉴욕이라는 도시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각 주제별 매대마다 책에서 발췌한 명언을 깨알같이 써놓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면 여행책 섹션에는 "세상은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세상의 한 페이지만 읽은 것이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 쓰여있는 식이다. 책 속에서도 배우고 책 바깥의 세상에서도 배울 게 있다.
하이라이트는 바로 여기. 아주 핀뱃지 덕후 환장하라고 만들어놓은 본격 핀뱃지 섹션이다. 다양한 종류의 뱃지를 한데 모아놓은 것뿐만 아니라, 책을 주제로 스트랜드에서 자체 제작한 뱃지도 예쁜 게 꽤 많았다. 한 40분 고민한 끝에 제일 마음에 드는 뱃지 4개를 골랐고, 이번 여행에서 지른 가장 만족스러운 소비로 기억됐다. 핀뱃지 말고도 마그넷, 엽서, 에코백 등 제품 종류가 다양해서 기념품 사기 좋은 곳이다.
어느새 유니언 스퀘어에 도착했고, 자체적으로 급 기획한 미드타운 브로드웨이 샵 투어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질락 말락 해서 이쯤에서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숙소에 돌아와 밀린 빨래를 돌려놓고 휴식을 취했다. 아주 잠깐 여행자가 아니라 여기 사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어서 스스로 좀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 친구도 숙소로 돌아왔고,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 우리는 창 밖 맨해튼 뷰를 바라보며 컵라면을 먹었다.
여유로운 오늘 저녁, 재즈바에 가면 딱이겠다 싶었다. 미리 공연 시간표를 검색해보고 그중 끌리는 곳을 찾았다. 재즈클럽과 극장이 모여있는 동네 웨스트 빌리지. 이쪽은 처음 와보는데, 지하철 역에서부터 들려오는 버스킹의 퀄리티가 상당해서 여기는 확실히 음악인들의 동네다 싶었다.
그리고 바로 웨스트 빌리지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왠지는 모르겠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너무 어려운데, 지하철역에서 밖으로 딱 나온 그 순간 본 차분한 풍경, 비 온 뒤의 적당히 습하고 시원한 공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 같은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내 심장을 거하게 치고 갔다. 오늘은 바로 공연 보러 가야 해서 시간이 없지만, 뉴욕에 있는 동안 꼭 한번 이 동네에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방문한 곳은 작은 재즈바 메즈로우(Mezzrow). 흔한 주택 건물 지하에 이런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다니 신기했다. 문 옆에 피아노가 없었으면 절대 못 찾았을 것 같다. 뭐 하는 데인지도 모르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이미 공연은 시작했다. 조용히 공연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앉아 술을 한 잔씩 시켰다.
피아노와 콘트라베이스, 여성 보컬 셋이서 하는 미니멀한 구성이었다. 보컬의 포스가 강했는데 '나 노래 잘해!' 뽐내는 스타일이 아니라 간드러지게 밀당하는 스타일이라 더 인상 깊었다. 음악을 갖고 노는 고수의 포스랄까. 보컬이 있는 공연을 볼 땐 아무래도 보컬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데, 피아노가 거의 뭐 물 만나서 날아다니는 솔로 구간이 많았던 것도 흥미로웠다. 모두가 한 번씩 돋보일 수 있도록 잠깐 빠져주고 받쳐주고, 다시 또 합을 맞춰 나가는 게 재즈의 매력이겠지.
우리 테이블을 제외한 대부분의 관객들이 일행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할머니의 생신을 맞아 대가족이 모여 함께 공연을 보러 온 듯했다. 중간에 즉흥적으로 할머니만을 위한 고품격 생일 축하 노래도 불러줬다. 그때 그 할머니와 가족들의 표정이 얼마나 따스웠는지. 우리 할머니는 아니었지만 순간 나도 뭉클해져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낯선 땅에서 한 시간 만에 우리 모두 가족이 되는 마법, 그 어려운 걸 음악이 해냅니다..
메즈로우에서 티켓을 받아 가면 입장료를 또 내지 않고 옆에 있는 재즈바 스몰즈(Smalls)의 공연도 볼 수 있다. 스몰즈도 '이름값 한다' 싶을 정도로 작았는데 사람은 훨씬 많았다. 메즈로우가 몽글몽글 따스운 촛불 같은 분위기라면, 여기는 야외에서 여럿이 왁자지껄 둘러싸고 있는 모닥불 같은 느낌이랄까. 아까는 예쁜 칵테일, 지금은 묵직한 생맥주가 딱 어울린다.
이 날 공연은 색소폰-피아노-콘트라베이스-드럼 구성의 4중주였는데, 서로 절대 안 지려고 온 기량을 다 쏟아붓는 것 같아 보였다. 이것은 소리 없는 전쟁이 아니라, 소리만 풍부하고 그 외 보기 싫은 것들은 하나도 없는 '무해한 전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살아있는 광경을 땀방울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운 1열에서 보다니 신기하다. 넘치는 에너지에 내 눈과 귀를, 그리고 소리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하루 안에 이렇게 다른 매력이 있는 좋은 공연을 두 개나 보다니, 오늘 밤 너무 완벽하다! 살짝 취해서 그런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광경이 아까보다 또 어제보다 살짝 더 예뻐 보였다. 음악으로 한껏 충만해진 이 기분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 졌다. 이렇게 좋은데 벌써 내일이면 맨해튼도 아니고 퀸즈에 있는 마지막 숙소로 옮겨야 한다는 건 믿을 수 없다. 뉴욕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를 조금만 더 붙잡고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