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6. 브라이언트 파크 - 공립 도서관 - MoMA - 브로드웨이
숙소를 옮기는 날이라 아침부터 분주했다. 남은 음식을 싹싹 모아 배부른 아침을 챙겨 먹고, 내 집처럼 벌려놓은 짐을 다시 챙겨놓고, 루프탑에 올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흐린 맨해튼 뷰를 감상했다.
강 건너 퀸스에 오니 확연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좀 무섭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여기도 다 사람 사는 동네니까, 금세 편해졌다. 오늘부터 3박을 하게 된 마지막 숙소 '더 로컬'은 딱 미드 같은 데에 나올 법한 전형적인 미국 호스텔 같았다. 크고 자유분방하고 꼭 새로운 인연이 생길 것만 같은 그런 느낌. 하필 4인실에서 남은 침대가 2층 침대뿐이었다는 점만 빼면 나름 만족스러웠다. 뉴욕에서 이 가격에 재워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오늘은 문화·예술 데이로 아예 컨셉을 잡아버린 날. 친구는 뮤지엄 패스를 사서 유명한 박물관과 미술관을 구경하러 떠났고, 하루에 미술관 한 군데 이상 갈 자신이 없는 나는 바깥세상을 좀 더 구경하다 오후에 합류하기로 했다. 저녁에는 한국에서 미리 예매해 온 뮤지컬 공연이 기다리고 있다.
오전에는 어디부터 갈까 고민하다가 마침 타고 있던 지하철이 브라이언트 파크를 향하길래 사람들을 따라 내렸다. 뉴욕 시내 안에서도 가장 바빠 보이는 미드타운 맨해튼 한복판에 당당하게 한 블록을 차지하고 있는 공원. 우리나라에도 센트럴파크를 표방한 'O트럴파크'가 각 도시마다 있을 정도로 사실 이제 도심 속 공원은 어딜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개념이지만, 브라이언트 파크는 도심 속 공원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 같아 보였다.
시민들이 저마다 필요로 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공원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테이크 아웃해서 혼밥 하는 사람에게는 식당, 커피 한 잔과 함께 수다 떠는 사람들에게는 카페, 비즈니스 미팅을 하는 직장인들에게는 회의실,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는 작업실이 되는 셈이다. 한쪽에서는 저글링 클래스가 열렸는데 그럼 거기는 교실 겸 연습실이겠지. 근처 회사들과 주요 시설들로부터 접근성이 좋고, 공원 안에는 바닥에 고정된 벤치보다 활용도가 높은 테이블과 의자를 비치해놔서 가능한 것 같다. 잔디밭에서는 일주일에 한두 번 무료 요가 클래스가 열리고, 겨울 되면 아이스 링크가 설치된다는데. 대체 이 공원의 변신은 어디까지인가.
흐리고 쌀쌀한 날에는 몸을 녹여줄 라떼 한 잔이 간절해진다. 근처에 괜찮은 카페가 있나 찾아보다가 확 꽂혀버린 곳. 문화생활 데이에 만난 커피집 이름이 무려 '컬처 에스프레소'라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지. 아주 작지만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딱 맨해튼 한복판에 있을 법한 카페랄까. 이번 여행에서 가본 카페 중 가장 현지의 느낌이 생생했던 곳. 포틀랜드 하트 커피 원두를 쓴다고 하니 괜히 더 맛있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카페인 충전됐으니 또 걸어보자.
뉴욕 공립 도서관은 가장 기대했던 곳 중 하나였다. 원래 마지막 날 친구와 함께 이곳에서 여행을 마무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옆에 있었다 보니 혼자 먼저 와보게 됐네. 사전답사라고 치고 구경해봤다. 유명한 대 열람실에 들어서자마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웅장한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달까.
당장 사람들 틈에 자리 잡고 앉아서 글을 쓰고 싶어 졌다. 나도 이 멋진 장면의 일부로 녹아들고 싶었고, 수많은 글이 읽히고 쓰였을 이 공간의 세월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아쉽게도 노트북은커녕, 당장 손에 종이랑 펜 하나도 없었다. 나중에 또 올 거니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여행 와서 글 쓰고 싶어 질 줄은 꿈에도 몰랐네. 역시 환경이 참 중요한 것 같다.
이제 슬슬 MoMA로 향해야 할 시간. 지하철을 타면 빨리 가겠지만 새로운 걸 하나라도 더 눈에 담고 싶어서 걸어가려고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 브랜드 매장들과 트럼프 타워가 있는 5번가와 타임스퀘어를 지나는 7번가, 둘 다 썩 끌리지 않아 그 사이에 비교적 한산한 6번가를 따라 걸었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간다고, 중간에 푸드트럭이 줄지어 있는 골목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외면하고 있었던 허기가 갑자기 한순간에 밀려온다. 교환학생 시절에 즐겨 먹던, 한국에서는 찾기 힘든 그리스식 샌드위치 gyro를 하나 사서 옆에 있는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았다. 옆사람도, 앞사람도 모두 푸드 트럭에서 사 온 음식을 혼자 앉아 먹고 있다. 여기 거의 뭐 맨해튼 6번가 직장인들의 카페테리아 같은.
록펠러 센터까지 왔는데 내 기억 속에 있던 화려한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겨울에 왔을 땐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와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스 링크가 있어 날은 추워도 따뜻한 느낌이었는데, 정작 더운 여름에 와서 보니 차갑고 삭막한 회색 건물 숲으로 밖에 안 보였던 건 좀 아쉬웠다.
잠시 들러본 NBC 스튜디오의 기념품샵. 세계적으로 유명한 TV쇼의 굿즈들이 진열되어 있다. 투어를 신청하지 않아 스튜디오 내부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내가 지금 미국 최대 방송사 건물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기하고 벅찼다. 바로 옆 건물에 있는 라디오 시티 뮤직홀 간판도 나에게는 꽤나 상징적인 존재로 다가왔다. MTV 뮤직 어워드가 열리는 곳이다. 여기가 바로 세계 대중문화의 중심 도시 맞구나.
한참을 돌고 돌아 드디어 MoMA 도착. 건물 입구와 로비에서부터 예술적인 느낌이 물씬 풍겨온다. 하루 종일 봐도 여기 있는 작품 다 못 볼 테니 관심 있는 전시만 집중 공략하기로 했다.
우선 4층 소장품 갤러리. 정말 진부한 표현이지만 교과서에만 보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모네의 <수련>,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같은 유명한 작품을 실제로 보는 게 신기하긴 했다. 작품의 스케일 자체가 주는 포스가 남달랐던 <수련>을 제외하고는 솔직한 내 감상은 '아, 이거 그거네' 정도. 위대하신 화가님들에게 죄송할 정도로 무미건조한 표정이었을 테다.
마침 3층에서는 <Good Design>이라는 모던 디자인 전시가 한창이었는데, 솔직히 내 취향은 이쪽에 훨씬 가까웠다. 평소에 관심 있어서 잡지나 SNS로 많이 찾아봤던 디터 람스, 바우하우스 스타일의 가구나 소품들을 이렇게 한 군데에 모아놓고 가까이서 샅샅이 살펴볼 수 있다니. 물 만난 고기처럼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하나하나 살펴보고, 두 번 보고 세 번 보고, 사진도 열심히 찍어놨다. 영감에 목말라하던 나에게 꼭 필요했던 생생한 취향 공부의 기회였다.
미술관에 있는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 차를 마시며 각자 마음에 들었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기프트샵에 들렀다. MoMA에서 다른 인기 전시관도 아니고 기프트샵이 개미지옥일 줄은 몰랐지. 예쁜 굿즈가 많아 한참 고민하다가 문 닫을 시간이니 빨리 가서 계산하라는 직원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겨우 앤디 워홀 포스터와 홀로그램 st 컵, 핀뱃지들을 샀다. 쇼핑 시간이 넉넉했으면 이 자리에서 바로 탕진했을지도 모른다.
밖에 나와보니 갑자기 믿기 힘들 정도로 거센 폭우가 몰아치고 있는 거다. 혹시 몰라 챙겨 온 우산을 둘이 꼭 붙어 나눠 쓰고, 거의 재난 영화 찍는 것처럼 비바람을 뚫고 겨우겨우 이동했다. 어디라도 들어가야겠다 싶어서 간 데가 바로 앞에 있는 맥도널드였다.
맥모닝을 씹으며 곧 보러 갈 뮤지컬 <위키드>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찾아봤다. 브로드웨이까지 와서 뮤지컬을 보는데 언어 때문에 이해를 못하고 노래만 듣고 가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서. 대사에서 웃음 포인트를 바로 알아차리고 따라 웃고, 감동적인 구절에서는 함께 눈물을 훔치며 교감하는 건 공연을 관람할 때 정말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알기에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위키드>는 역시 소문난 뮤지컬답게 당연히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는데, 솔직히 공연 내내 들었던 생각은 '배우들이 진짜 잘한다'였다. 아무래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는 배우들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검증받은 실력자들이지 않을까. 잘한다는 배우들 사이에서도 가장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작품일 거다. 그래서 다들 한 번쯤은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봐야 한다고 말하는 거겠지. 엄청난 수준의 공연을 본 만족감에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기분이었다.
개인적으로 라이브로 듣고 가장 크게 감동받은 넘버 'For Good'에 꽂혀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내내 가사 한 구절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 'Because I knew you I have been changed for good' 극과 극이었던 두 친구 엘파바와 글린다가 온 감정을 끌어모아 서로 '너를 만나고 내가 달라졌다'라고 노래하는데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누구를, 또 무엇을 만나고 달라져서 지금의 내가 되었나 괜히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의 변화를 가져다준 것들 위주로. 무수히 많은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우선 오늘 하루 그리고 지난 6일 동안에 보고 들은 것들이 강렬하게 번뜩였다. 어쩌면 이미 내 안에 어떤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