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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특유의
손때 묻은 느낌이 좋아서

Day 7.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by 이리터

며칠째 비가 올 듯 말 듯 잔뜩 흐린 뉴욕 하늘을 맞이하는 게 더 이상 아쉽지 않을 정도로 제법 익숙해진 7일 차의 아침. 오늘도 친구와는 각자 시간을 보내다 저녁 즈음 만나기로 느슨한 약속을 하고 하루를 시작했다. 구글맵을 켜고 어디를 가볼까 아직 안 가본 데를 찾아보다가, 문득 벌써 내일이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미 다녀왔지만 벌써 그리운, 다시 찾지 않으면 후회할지도 모르는 곳에 가야겠다.

IMG_5870.jpg 숙소를 나서며

바로 그곳, 브루클린으로 넘어왔다. 본격적으로 돌아다니기 전에 연료를 채워준다는 마음가짐으로 아침 식사할 곳부터 찾았다. 몇 년 전부터 SNS에서 핫했던 '레인보우 베이글'을 처음으로 만든 가게, 원조집답게 이름도 근엄한 '더 베이글 스토어'다. 레인보우 베이글의 팬시함과는 거리가 먼 허름한 동네 가게였던 건 살짝 반전. 로컬들만 있는 곳에 나 혼자 여행자임을 깨달을 때 '결국 이런 데까지 찾아왔구나' 하는 묘한 뿌듯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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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gel Store Original Rainbow Bagel

베이글들이 다 오색찬란 현란하고 스프레드 종류도 너무 다양해서 고르기 어려웠는데, 여기까지 왔으니 제대로 한번 미쳐보자는 마음으로 레인보우 베이글에 레인보우 페티 크림치즈를 골랐다. 귀엽고 현란하고 아주 불량하게 생겼다. 마침 한국에 있는 가족들로부터 안부를 묻는 카톡이 왔는데, 잘 챙겨 먹고 다닌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이 사진을 보냈다가 잔소리를 들었더랬다.

IMG_5908.jpg 예쁘니까 됐어




윌리엄스버그로 이동하여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브루클린 아트 라이브러리. 평범한 사람들이 작은 스케치북을 직접 자신들의 이야기로 채워 넣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핸드메이드 책 수 만 권을 모아놓은 작은 도서관이다. 감동할 수밖에 없는 아이디어, 감탄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나를 빽빽하게 둘러싼 이 책들이 곧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단면이자 세월의 압축이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고, 하나하나 빨리 읽고 싶어 져서 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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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oklyn Art Library

태생은 다 똑같은 규격의 스케치북에 불과했겠지만 다양한 이들의 손을 거쳐 표지도 구성도 주제도 다 제각각인 개성 넘치는 책으로 다시 태어났다. 어린아이가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책부터 화려한 예술 감각이 돋보이는 디자인북까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주제인 책에 눈길이 갔다. 예를 들면 여태껏 내가 사귀었던 남자들을 쭉 소개하는 이런 책. 누군가의 일기장을 엿보는 듯한 시시콜콜한 재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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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야기로 책을 쓰는 건 대단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인정할 만한 성과나 업적을 이루거나, 독자들을 사로잡을 만한 엄청난 인사이트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줄 알았던 영역. 브루클린 아트 라이브러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크고 작은 기록들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를 증명한다. 모든 이들의 이야기는 남겨지고 전해질 만한 가치가 있다고. 자기만의 스토리를 담아낼 줄 아는 이들의 재능이 부럽고, 꼭 전문 작가나 아티스트가 아니어도 누구나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이런 분위기와 환경이 질투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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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일 무엇

윌리엄스버그, 이 동네가 마음에 들었던 가장 큰 이유. 그냥 길거리를 걷기만 해도 늘 볼거리가 넘쳐난다. 매 블록마다 재미있는 그라피티로 뒤덮인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이런 건물을 사람으로 친다면 그라피티는 꼭 타투 같아 보였다. 아주 확실하게 아이덴티티를 표시하는. 그리고 오늘따라 가게 앞 입간판에 쓰인 문구들이 왜 이렇게 센스 넘쳐 보이는지. 지나가다 보고 마음에 드는 가게에는 들어가 구경해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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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스 무엇

그중에서도 정말 범상치 않은 포스를 풍기던 이곳에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들어갔다. 엄청난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널브러져 있는 거대한 창고 같았달까. 무슨 화개장터도 아니고, 이 빈티지 샵에는 정말 없을 거 빼고 있을 건 다 있었다. 그저 지나가는 누군가에게는 쓰레기 더미로 보일 수 있어도, 관심과 애정을 갖고 파헤쳐보면 그 안에서 보물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탐나는 소품들이 많았지만 여행자의 손에 허락되는 건 당장 매고 있는 가방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물건뿐이다. 한참을 고른 끝에 출처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열쇠와 문고리, 빈티지 컵받침, Scrabble 보드 게임 조각 몇 개를 샀다. 총지출 4.25달러. 하등 쓸모없는 잡물건을 샀는데 그 만족감은 여느 쇼핑 못지않았다. 이 거대한 더미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보물들을 건져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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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her of Junk

이어 구경한 독립서점 맥널리 잭슨 북스와 인디 음반 전문점 러프 트레이드 NYC. 이렇게 다양한 취향을 취급하면서도 꽤나 규모 있는 서점과 레코드샵이 한 동네에 있다니, 윌리엄스버그 주민들은 참 복 받았다. 서점 2층에는 독서 토론이나 소모임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고, 러프 트레이드에는 매장 안에 실제 인디 밴드들이 공연하는 작은 무대가 있더라. 두 곳 모두 분명 이 동네에서 중요한 커뮤니티 역할을 하고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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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Nally Jackson Books & Rough Trade N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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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스버그의 전형적인 풍경을 지나 서쪽으로 쭉 걷다 보니 공원이 나왔다. 브루클린의 가장 서쪽, 그러니까 이스트 리버를 건너 맨해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뷰 포인트다. 빽빽하게 높은 빌딩들이 자리 잡은 저곳과는 달리, 지금 이곳은 한적하고 고요하다. 요즘 우리가 더 잘 나가! 아냐, 우리가 더 빨라! 아우성치는 전쟁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분명 브루클린도 트렌디한 동네지만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세월의 가치를 아는 곳이기에, 지금 여기 시간의 속도는 딱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속도로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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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sha P. Johnson State Park

뷰에 좀 더 몰입하고 싶어서 물가로 내려가 돌을 밟고 서봤다. 루프탑에서 야경을 볼 땐 그렇게 삐까뻔쩍 찬란해 보이던 곳이 어쩐지 조금 황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날씨 탓도, 기분 탓도, 지금 듣는 노래 탓도 있겠지 생각할 때쯤이었나. 어찌 알고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황급히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발걸음을 돌렸다.

IMG_6197.jpg 또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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