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7.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 그리니치 빌리지
잠깐 비를 피하러 들어온 '킨포크 94'라는 카페. 우리가 잘 아는 킨포크 잡지나 라이프스타일과는 딱히 관련 없어 보였지만, 그냥 힙해 보여서 한번 와봤다. 미드에서 뉴요커들이 빌려서 파티하고 그러는 전형적이니 브루클린 스튜디오의 모습. 소심한 내가 주문하려고 카운터 앞에 멀뚱멀뚱 서있는데 친구랑 대화하느라 신경도 안 쓰는 시크함은 덤. 딱히 커피 같은 게 안 땡겨서 미국 아재처럼 버드와이저를 주문해 벌컥벌컥 마시며, 빗줄기가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렸다.
철제 의자에 오래 앉아 등이 배겨 아파올 때쯤 근처에 다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영화 <인턴> 촬영지이기도 한 '파트너스 커피'는 이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커피집 중 하나다. 그만큼 규모도 제법 있고 사람들도 바글바글한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노트북을 켜놓고 공부하거나 작업하는 동네 독서실 느낌은 서울에 있는 스타벅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번에는 따뜻한 차이 티 라떼를 한 잔 시켜놓고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관찰했다. 지금 여기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아주 바빠 보인다.
마침 친구에게 연락이 와서 이따 저녁에 어디에서 만날 지를 정했다. 이제 딱히 안 가본 지역은 없는 것 같고, 꼭 가보고 싶었던 레스토랑도 떠오르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그리니치 빌리지가 떠올랐다. 그저께 저녁에 재즈바 가면서 본 그 동네 느낌이 왠지 좋았다. 아직 저녁 먹으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미리 가서 둘러보고 싶은 곳들이 있었다.
강 건너 달려온 그리니치 빌리지, 그저께 봤던 소박한 예술가 마을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웅장한 우울함'이랄까. 좋게 말하면 사연 있을 것 같고, 나쁘게 말하면 귀신 나올 것 같은 오래된 맨션 건물과 낡아빠진 간판들이 주는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가 있다. 날씨만 흐린 줄 알았는데 공기에도 먹구름이 잔뜩 낀 것 같았다. 근데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이건 도피하고 싶은 우울함이 아니라, 그 안에 파고들어 하나하나 뜯어보고 싶은 이국적인 신비로움이었다.
유독 적갈색의 벽돌 건물이 많은 동네라 '갈색 도시'로 기억되기도 한다. 짙은 가을이 되면 더욱 분위기 있을 것 같다. 나에게 다음 뉴욕 여행이 있다면 그땐 꼭 시원한 계절에 와서 이 동네에 한번 머물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뉴욕 최애 동네는 여전히 윌리엄스버그지만, 맨해튼 땅덩어리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동네를 고르라면 이제부터 단연 그리니치 빌리지다.
한번 구경해보고 싶었던 '굿즈 포 더 스터디'를 찾아갔다. 문구점 이름이 '공부에 필요한 물건들'이라니 너무 귀엽잖아요.. 사실 펜, 수첩, 사무용품 등 제품만 보면 우리나라 핫트랙스나 알파 문구랑 크게 다를 바는 없어 보였는데, 훨씬 고급스러워 보이고 뭔가 소장욕구를 일으키는 건 진짜 공부하고 싶게끔 꾸며놓은 매장 공간과 디스플레이가 한몫하는 듯하다. '여기가 내 방, 내 서재였으면' 하고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거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더라. 레스토랑을 찾아가는 길에 갑자기 비가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오전에는 비가 젠틀하게 온다 했다. 벌써 3일째 폭우와 함께하는 뉴욕 여행이다. 점심도 못 먹고 비에 젖은 불쌍한 생쥐 꼴이 되어 도착한 친구와의 약속 장소. 하루 종일 파스타를 먹고 싶어 했던 나는 '오늘의 파스타'를 주문했다. 내가 원했던 정통 이탈리안 파스타는 아니었지만, 왠지 미국 가정집에서 엄마가 손수 차려준 저녁 식사 느낌이었다. 묘한 중독성이 있어 계속 손이 가는 그런 맛.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어마어마한 양의 파스타처럼 빗줄기도 줄어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루를 마감하기에는 아직 좀 이른 시각이지만, 각자 열심히 돌아다니느라 힘들었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이만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리니치 빌리지를 더 샅샅이 둘러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마음 편한 동네에 와서 잠깐 쉬어 간 거라고 생각하면 괜찮을 것 같다.
이대로 잠들기엔 밤이 너무 길어 호스텔 로비에서 맥주 한 잔 하자고 했다. 그리고 친구가 어딘가에서 가져온 대혼란의 메트로카드 퍼즐. 피스가 다 똑같이 생겼는데 이걸 사람이 맞출 수가 있는 건가?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살짝 멀미가 날 뻔했다. 어쨌든 나에게는 맥주가, 친구에게는 퍼즐이 있어 시간은 잘 갔다.
야속하게도 이제 씻고 자려고 하니 비가 그쳤다. 아쉬운 마음에 옥상에라도 올라 먹구름 속 뿌연 맨해튼 야경 뷰를 감상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경험한 그 화려한 도시는 가까이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저 멀리 있다. 벌써 여행 끝무렵인데 어쩐지 오늘은 엄청 재미있었거나 대단한 감상이 남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조금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뭐 어떻게 매일매일이 좋을 수 있겠어.. 하지만 마지막 날인 내일은 아주 끝내주는 하루를 보내야겠다. 뉴욕 여행의 대미를 장식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