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8. 브라이언트 파크 - 5th Ave - 토미 재즈
어느덧 늦은 오후, 짐 싸고 공항 가느라 바쁠 내일을 제외하면 이제 여행이 딱 반나절 남은 셈이다. 이제 진짜 뉴욕과 서서히 작별 인사를 해야 할 때다. 마지막 저녁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보다는, 친구와 근사한 곳에서 여유롭게 식사하며 이번 여행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다시 만난 브라이언트 파크. 전에 본 먹구름 잔뜩 낀 평일 어느 날의 공원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맑은 주말 오후에는 세상에서 가장 활기찬 공간이 된다. 뉴요커들은 도심 속 잔디밭에 편하게 누워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며 오랜만에 비춘 햇살을 맘껏 즐기는 듯 보였다. 또 한쪽에서는 야외 요가 수업이 진행 중이었는데,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오롯이 자신의 몸에만 집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다른 이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아직도 막 신기해한다. 촌스럽게.
친구는 뉴욕 공립도서관 대열람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잠깐이라도 글 쓰는 시간을 가지면 꽤 우리답고 멋진 마무리 세리머니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인간적으로 너무 덥고 지치고 목이 말라서 금방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바로 옆에 있는 블루바틀로 가서 아이스 메뉴인 뉴올리언즈를 주문했는데, 덕분에 갈증은 금방 해소됐지만 솔직히 맛은 내 취향이 아니더라.
저녁이 다 되어갈 무렵 공기가 제법 선선해져 좀 걷기로 했다. 고층 빌딩 사이를 헤집고, 바쁜 인파를 뚫고 자유인의 신분으로 걷는 걸음은 매우 경쾌했다. 사실 맨해튼 번화가는 지난 일주일 동안 실컷 봐와서 낯익은 풍경이었을 수도 있는데, 언제 누구와 함께 어떤 마음 가짐으로 걷냐에 따라 또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지나가다 친구가 잠깐 구경하자고 해서 들러본 서점 Barnes & Noble. 아마존 때문에 미국 최대 서점 체인인 반스앤노블이 파산 위기라고 한 기사를 어디선가 본 적 있는데, 그래도 다행히 아직까진 버텨주고 있나 보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 그런지 모든 게 빨리 변하는 이 맨해튼 땅에서 여기 서점만 점시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7년 전의 흔한 미국 서점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던 구성.
의외로 인상적이었던 건 문구 섹션에서 발견한 메모지와 노트였다. 그냥 평범한 종이 묶음에 불과했을 수도 있는데, 자세히 보면 그 목적과 쓰임새가 말도 안 되게 디테일하고 위트 있게 디자인되어 있다. 예를 들면 그냥 투두 리스트가 아니라 '다 끝내고 술 마시기 위해 쓰는 오늘의 할 일들', 그냥 비밀 일기장이 아니라 '내가 로그아웃 하고 싶은 순간들' 같은 식이다. 문구는 아기자기한 우리나라나 일본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미국에서는 또 다른 결의 생활 디테일을 발견해서 재미있었다.
세계적인 명품 매장들이 즐비하다는 그 유명한 5번가를 따라 쭉 걸었다. 루이뷔통, 아르마니, 불가리 이런 커다란 이름들이 그냥 길가에 아무렇지도 않게 떠다닌다. 고오급 백화점 1층 매장의 확장판 같았달까. 명품은커녕 쇼핑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나에게는 딱 '신기하네' 정도의 감상만 남았다.
우리의 지갑이 열린 곳은, 아니 열어야 할 수밖에 없는 곳은 따로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가족에게 줄 선물과 회사 동료들에게 나눠줄 간식을 이제는 정말 사야 했기 때문이다. 정말 최후의 순간에 겨우 지나가다 보이는 영양제와 마트에서 이것저것 샀다. 해외여행 경험이 쌓일수록 다른 건 다 익숙해지고 나름의 팁이나 노하우가 생기는데, 돌아가기 전에 선물 사는 건 여전히 제일 어렵다. 마음 한편의 짐이었던 임무를 완수했으니 이제 드디어 즐길 일만 남았다.
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만한 분위기 좋은 장소로 선배가 추천해준 곳.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재즈바인데, 음식 맛도 훌륭하고, 밤에 라이브 공연도 열린다고 하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조건을 다 갖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많은지 그 앞에서 한참 대기한 끝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가까이에서 공연을 즐길 수 있는 1층이 만석이라 우리는 2층의 어두운 구석 자리로 배정받았는데, 오히려 라이브 연주를 bgm 삼아 대화에 집중하기 좋은 아늑한 자리여서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인기 메뉴라는 명란 파스타와 오므라이스를 주문했는데, 이거 안 먹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의외로 이번 여행 통틀어서 먹은 음식 중에 제일 맛있었다. 가장 익숙한 음식이 최고로 맛있게 느껴진 것도 역시 마지막 날 밤이라서였을까.
맛있는 음식과 적당히 센 술,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라이브 재즈, 따뜻한 조명과 편안한 분위기.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완벽했다. 더 바랄 게 없었다. 이번 여행을 처음부터 쭉 돌이켜보며 가장 좋았던 순간 세 가지씩을 꼽아보자고 했다. 센트럴파크 피크닉, 브루클린 플리 마켓, 그리고 또...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다 필요 없고 지금, 바로 지금이라고 말했다. 친구도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보통 여행의 마지막 밤은 항상 아쉽고, 돌아갈 생각에 우울해지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달랐다. 지난 8일 동안 알차게 잘 구경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마무리가 완벽해버리니 바라던 모든 게 충족되는 꽉 찬 여행이 완성되었다. 이런 만족감이라면 이쯤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도 괜찮겠다, 가서 다시 열심히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도 생겼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애석하게도 술잔은 바닥을 보였고, 시간은 어느덧 자정이 넘어 더 늦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다시 퀸즈로 넘어와 숙소로 걸어가는 길이 씁쓸하지는 않았지만 뭐랄까, 조금 애틋했다. 이제 진짜 끝이라는 걸 받아들인다는 게 아주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나 보다.
결국 씻고 자기 전에 진짜_정말_레알_리얼_최종_파이널로 뉴욕을 눈에 담고 싶어서 루프탑에 다시 한번 올랐다. 야경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서 좋아하는 노래를 혼자 쭉 넘겨 듣다가 손이 멈췄던 곡. 태연의 '커튼콜'. 콘서트 앵콜 무대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곡이라 그런지 이 노래를 들으면 아쉽지만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집에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시 안녕'이라는 구절이 반복되는 노래 끝무렵에 속으로 '다시 만날 그 날까지 안녕'이라고 뉴욕에 작별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나 홀로 커튼콜 의식과 함께 이번 여행도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