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8. 타임스퀘어 - 어퍼웨스트 - 리버사이드 파크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마지막 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래도 오늘 하루 온전히 시간을 누리고 편하게 돌아다니라고 다행히도 맑은 하늘이 반겨준다. 아침부터 루프탑에 올라 반가운 햇살을 잠깐 쬐다가 다시 부지런히 길을 나서본다. 오늘도 친구는 미술관으로 먼저 향했고, 우리는 각자 시간을 보내다 늦은 오후쯤 만나 함께 여행의 끝을 기념하기로 했다.
뉴욕을 떠나기 전에 다시 가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곳은 단연 타임스퀘어였다. 셋째 날 저녁에 갔었지만 그땐 여러모로 사람들에 치이는 게 짜증 나는 상황이었고, 곧 또 오겠지 싶어서 얼마 안 있다 금방 떠난 게 아쉽긴 했다. 아침 일찍 가면 그래도 좀 한산할 것 같아 곧바로 타임스퀘어로 가는 지하철을 탔고, 내리자마자 '한산한 타임스퀘어'란 현실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단어 조합임을 깨달았다.
타임스퀘어 한복판 tkts 계단에 올라 바라본 모습. 큰 세상을 마주한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벅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화려한 전광판으로 360도 둘러싸여 있는 이곳은 사실 어린 내가 동경하던 무대였다. 광고를 너무 하고 싶어 했던 20대 초중반 시절, 나에게는 뉴욕 타임스퀘어에 내가 만든 광고를 걸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주겠다는 또렷한 꿈이 있었다.
분명 큰 포부였지만 막상 여기 와서 보니 터무니없는 허황된 꿈은 아니었었구나 싶었다. 친숙한 우리나라 브랜드 광고도 눈에 띄었는데, 볼 때마다 그때 그 회사에 합격했더라면, 포기하지 않고 계속 광고업계에 도전했더라면, 어쩌면 저 화려한 광고에 내가 참여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조금 씁쓸한 한편, 꼭 광고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세계 무대를 향해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새로운 꿈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속으로 느껴졌다.
계단에 하염없이 서 있으면 괜히 센치해질 것 같아서 금방 움직였다. 여행 마지막 날이니 이제 가족들과 회사 동료들에게 줄 선물을 사야 할 마지노선 디데이가 닥친 셈이다. 초콜릿은 모든 여행 선물의 기본.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하는 허쉬와 엠앤엠스 월드를 구경했다. 작은 초콜릿 하나를 이렇게까지 상징적으로 브랜딩 하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 마케팅, 브랜딩 하는 사람들에게 타임스퀘어는 정말이지 최고의 학습 현장이다.
구경은 앰엔앰에서 실컷 하고 정작 구매는 허쉬에서 했다. 예쁜 틴 캔에 담긴 초콜릿 두 통을 사들고 이제 약속 장소로 떠난다. 뉴욕에서 공부하는 선배를 1년 만에 만나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50번가에서 지하철을 타고 110번가까지 쭉 올라왔다. 어퍼웨스트는 이번 여행에서도 처음이고 전에도 와본 적은 없는 동네였는데, 생각보다 깔끔해서 살기 좋을 것 같다 생각했다. 그 유명한 할렘 바로 옆이라 괜히 편견을 갖고 겁먹었었나 보다.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브런치 카페에서 편안한 차림으로 로컬 주민 포스를 풍기는 선배를 만났다. 퇴사하고 미국 대학원으로 유학 온 회사 선배였다. 엄청 다이내믹한 지난 1년을 보냈을 테다. 직업도, 사는 곳도, 주변 사람들도, 모든 게 다 바뀌어버렸을 테니 '어떻게 지냈냐'는 물음에 근황 토크가 끊이질 않았다.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해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이번 방학에는 유명한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여전히 연애에는 별 관심 없고, 팀에서 다른 사람이 하던 일을 이제 내가 맡고 있다는 게 그나마 빅뉴스였다. 어쨌든 지금 휴가 와서 행복하고, 이렇게 멋진 도시에 사는 선배가 부럽다는 말도 덧붙였다.
밥 먹고 소화시킬 겸 학교를 구경시켜줬다. 여기는 주로 수업 듣는 강의실, 여기는 학생회관 같은 건물, 여기는 내가 레주메 쓰고 인터뷰 준비했던 카페.. 혼자 둘러봤다면 그냥 캠퍼스 예쁘다 하고 끝났을 텐데, 재학생의 생생한 가이드 투어와 함께하니 여기선 누가 뭘 하고 있을지 구체적인 모습이 상상됐다. 여기 학생들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부하고 준비하는 게 불안한 건 똑같겠구나 싶다가도, 유명한 아이비리그 대학교니 그런 걱정을 덜할까, 성공은 어느 정도 보장된 걸까 싶기도 하고.
캠퍼스에서 한 블록만 더 가면 허드슨 강 따라 나있는 리버사이드 파크에 닿는다. 학교랑 집 앞에 바로 이렇게 멋진 산책 코스가 있으면 살 맛 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하게 탁 트이는 효과가 있으니까. 눈부시게 끝내주는 오늘 날씨도 한몫했고. 나는 처음 보는 풍경에, 선배는 오랜만에 보는 자연에 감탄하며 걷다가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한참 이야기를 나눴는데 솔직히 모든 내용이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내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선배와 나는 고민의 스케일이 다르구나, 역시 더 멀리 내다보는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와 같은 학교를 나와서 같은 회사 같은 부서에서 같은 일을 했는데, 지난 1년 동안 더 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 노력하다 보니 지금은 훨씬 앞서가고 있구나. 이렇게 나도 모르게 부러워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나는 몇 년째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답답해서 여행을 떠나온 것도 있고 하니까.
선배가 내게 유학할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당장 돈 없어서 못한다는 현실적인 제약에 생각이 콱 막혀버렸지만. 조금이라도 젊을 때 해외에서 살아보고 싶긴 한데 딱히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도, 더 공부해보고 싶은 학문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럼 외국에 있는 회사로 이직을 알아보는 건 어떻냐고 한다. 마침 요즘 어떤 회사가 한국 시장에 관심 있어하던데 네가 잘 아는 분야 아니냐고 알려줘서 한참 신나게 그 주제에 대한 썰을 풀었다. 그러다 이내 현타가 오기도 했다. 이렇게 관심도 있고 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으면서도, 나는 도전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미리 알았던 것도 같다.
왜냐면 나는 용기가 없는걸요. 선배처럼 회사 다니면서 다른 일을 준비할 용기도, 아무것도 없는 낯선 땅에서 혼자 시작할 용기도, 문화도 언어도 다른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나갈 용기도 없어서. 아마도 지금처럼 그냥 쭉 살 걸요.
뉴욕에서 일하는 게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내가 이곳에서 훨씬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결국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나에게 익숙한 서울이라는 도시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용기를 낸 선배에 대한 부러움과 젊은 나이에 벌써 현실과 타협해버린 나 자신에 대한 아쉬움, 그런 복잡한 마음을 안고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선배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여행 마지막 날 선배를 만난 게 꼭 책 말미에서 주는 교훈처럼 크게 와 닿았고 오랜 여운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