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의 월말결산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까워 남겨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매달을 기록해둡니다.
7월에 읽은 책
• <싫존주의자 선언> - 사과집
- 이젠 내가 남들보다 좀 더 예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내 안의 예민함을 잘 다스리며 더불어 살아가기로 했건만. 여전히 이 세상에는 무심함과 무례함이 만연하고, 가끔은 그것들이 폭력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그건 잘못됐다고 생각해'라고 말하지 못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떠오른다. 용기가 없어 표현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분노하고 있으니, 언제나 조져지는 건 내 멘탈이었지.
똑 부러지는 명료한 언어로 본인의 경험과 생각을 풀어낸 사과집 님의 글을 읽으며, 뭐가 그렇게 이상하고 답답했는지, 그동안 혼자 우물쭈물 삭혀냈던 알 수 없는 분노의 이유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그건 어느 개인의 유별남이 아닌, 동시대를 사는 또래 한국 여성이라면 숱하게 겪어왔을 보편적인 불편함이었다. 나만 예민한 게 아니었구나 하는 위안이 되기도 했고, 같은 분노를 느끼는 우리가 각자 나름의 투쟁을 벌이다 보면 어쩌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강인한 기대감도 생겼다. 그러니 나도 이제부터 내 생각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같은 마음으로 연대하는 이들이 있으니까.
"그제야 알았다. 용기 있는 사람만 말하는 게 아니라, 말을 하며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자기 디스의 힘' (중략) 자기 객관화가 된 사람은 용기 있게 부족한 점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성숙한 사람에게만 그런 '자기 인식' 능력이 있다."
"세상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고, 세계의 불의와 고통에 우리는 얼마간의 책임이 있다.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보단, 페미니즘적 사고로 살아가는 것, 한 명의 그레타 툰베리가 존재하는 것보단 다수의 사람이 '툰베리적'으로 환경문제에 동참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완벽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 김규진
- 트위터로 먼저 접했던 '한국 국적 유부녀 레즈비언' 김규진 님의 이야기. 너무 재미있어서 푹 빠져서 읽었는데, 글만 봐도 저자가 정말 똑똑하고 야무지고 매력 넘치는 사람이라는 게 자연스레 느껴져서 확 매료되는 느낌이었달까. 프러포즈 기획서 아이디어 너무 천재적이고, 혼인서약서 내용 눈물 줄줄 감동. 비록 법적으로 인정받는 절차는 아니었지만, 결혼이라는 건 이렇게 책임감 있고, 실행력 있고, 준비된 사람들이 하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부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동성애자라고 해서 남들 이상으로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가끔 도무지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두려움을 무릅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례들을 믿는다. 그렇게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사회는 변한다."
• <기록의 쓸모> - 이승희
-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해온 만큼 기록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고, 일과 일상의 많은 부분들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기록에 대한 엄청난 인사이트를 발견하진 못했다. 다만 그 기록들을 어떠한 형태로든 나의 것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보낼 줄 아는 능력은 배울 필요가 있겠다고 느꼈다. 기록의 중요성의 다음 단계는 실행의 중요성.
7월에 즐겨들은 음악
• DAY6 (Even of Day) 미니 2집 <Right Through Me>
- 티저 때부터 이번 타이틀은 '됐다! 이거다!' 하는 느낌이 왔고 역시나 옳았다. '뚫고 지나가요' 올해의 노래로 지정해도 손색없다. 데이식스가 아련한 윤상st 90년대 K발라드 재질 음악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하다 하다 일렉 기타까지 잡는 영현은 이제 어떤 경지에 오른 뮤지션이 된 것 같고, 원필은 뮤지컬 이후로 보컬이 훨씬 단단해져서, 개인적으로 이전 유닛 앨범에서 느꼈던 약간의 사운드적 아쉬움이 이번 앨범에는 전혀 없었다. 이번 앨범 전반적으로 곡 전개가 뻔하지 않아 좋고, 그중 최애 수록곡은 가사가 내 심장을 뚫고 간 '우린'. 희망이 떠오르면 절망은 저무니까 기쁨만 기억하고 살자, 우린 우린 우린-
• 태연 'Weekend'
- 괜한 복잡한 생각들 다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들으면 참 산뜻하고 즐겁고 좋은 노래. 여름에는 이런 노래 듣는 게 국룰이지. 그냥 이끌리는 대로 해도 괜찮으니까, 태연 언니 하고 싶은 거 다 해!!!
• Juju 'Sommer in Berlin'
- 술 베를리너 좀머 검색하다가 우연히 얻어걸린(?) 음악 디깅. 몽환적인 여름밤의 힙한 클럽 분위기 미쳤다. 독어 가사 뭐라고 하는지 1도 못 알아듣겠지만 '벨린~ 벨린~' 하는 후렴구 발음이 너무 부드러워서 내 귀에 캔디처럼 계속 귀에 집어넣고 싶어..
7월에 본 영화와 드라마
• 넷플릭스 드라마 <트링킷> 시즌1~2 (2019)
- 포틀랜드 배경, 여성들의 우정, '빅 리틀 라이즈' 10대 버전. 이 세 키워드만으로 볼 이유가 충분했다. 달라도 너무 다른 세 사람이 티격태격하면서도 결국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힘이 되어주는 완벽한 서사. 삼총사 중 특히 모 캐릭터에 푹 빠져서 봤다. 완전 마이웨이이면서도 똑똑하고 웃기고 의리 있고 솔직한, 인프제 인간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확신의 엔팁 재질이라 나도 저런 친구 있으면 좋겠다 생각.
"What if the people you least expect could turn out to be your people, if you let them?"
"You can always free yourself, face your actions, and fix what you can."
• 일본 후지TV 드라마 <롱 베케이션> (1996)
- 마와레 마~와레 메리고~라운드~ 'La La La Love Song'이 이 드라마 OST였고, 전설의 이 영상이 이 드라마 편집본이라는 걸 안 이상 안 볼 수가 없었고. 이런 전형적인 로코물엔 딱히 흥미 없지만 이 작품이 그 수많은 '전형적인 로코물'의 원형이란 걸 안 이상 "역시 클래식은 클라스가 달라"라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고. 무려 25년 전 작품이라는 걸 믿기 힘들 정도로 연출과 스타일이 힙하고, 생각보다는(?) 덜 빻아서 재미있게 봤다. 무엇보다 남주 얼굴과 여주 매력이 그냥 다해먹는..
•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스케이터 걸> (2021)
- 오랜만에 엔딩 크레딧 보며 박수 치고 5점 만점 준 영화. 가난, 계급, 가부장제 같은 것들 때문에 단 한 번도 본인이 원하는 걸 해본 적 없는 소녀가 인생 처음으로 경험해본 자유. 꼭 해야만 하는 의무이거나 잘한다는 소리 듣는 재능 때문이 아니라, 그냥 재미있어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 그게 다른 운동도 아닌 스케이트 보드라니. 널빤지에 바퀴만 달려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스케이트 보드의 자유정신이 프레르나와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줬다. 너무 아름다운 스토리라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났고.. 날이 선선해지면 거의 10년째 창고에 처박혀있는 내 크루저 보드를 다시 꺼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제안을 거절하면 앞으로도 똑같은 날이 계속되겠죠. 하지만 수락한다면 내일은 조금 나아질지 몰라요. 여자아이 몇 명에게 꿈을 좇을 용기를 심어줄 수도 있겠죠."
"넘어지면요? 바로 끝이에요? 아니, 보드에 다 타면 돼. 마지막까지 계속 타면 받는 점수도 있단다."
• 아일랜드 영화 <데이팅 앰버> (2021)
-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며 자유롭게 살기 위해 떠날 준비를 하는 앰버, 그리고 주어진 현실 상황에서 어떻게든 평범하게 살아가고자 자기 자신을 감추며 버텨내는 에디. 이성애적인 로맨스 감정은 아니지만, 서로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주며 함께 성장하는 풋풋한 사랑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보는 내내 에디는 찌질한 겁쟁이 같은 반면, 앰버는 매력 쩔고 힙하고 성숙하기까지 해서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둘의 데이트 씬만큼은 최근에 본 영화 통틀어 가장 빛나는 장면으로 기억에 남았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넷플릭스 시리즈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2021)
- 이거 왜 끝까지 봤지. 오랜만에 나오는 청춘 시트콤이라고 해서 기대했건만, 솔직히 이 작품은 글로벌 망신이다. 여혐 정서 짙게 깔린 빻은 대사와 시대착오적인 유머 코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게 컨셉인 외국인 유학생들 입에서 들으니 더 빻았다. 연출진이 한때 잘 나가시던 유명한 분들이면 뭐 하나. 이렇게나 시대의 흐름을 못 읽고 누군가를 비하하고 상처 주는 게 웃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 걸. 그리고 제이미랑 쌤 연기 너무 어색해서 봐주기 힘들었다. 진짜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7월에 인상 깊게 본 콘텐츠
• EBS 유튜브 <딩동댕 대학교> (2021)
- '딩동댕 유치원' 보고 큰 어른이들을 위한 A/S 교육 콘텐츠라는 게 신선했다. 맞아, 2030에게도 이런 콘텐츠 너무 필요했지 싶다. 사회생활하면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 우리도 배우고 싶거든. 그 와중에 폰대학, 유사 명문이라는 대학 컨셉질 너무 웃기고, 낄희 교수님과 붱철 조교 캐릭터 너무 힙해서 더욱 매력적. 아직 구독자 수가 많지 않은데, 꼭 펭수처럼 빵 터져서 오래오래 콘텐츠 생산해줬으면 좋겠다.
• 유튜브 <버러돌망> (2021)
- 아이돌 덕질 생태계에 대한 풍자와 해학 오지는 하이퍼 리얼리즘 콘텐츠. 1~2분 남짓한 짧은 러닝타임에 임팩트 있는 스토리텔링이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크게 되실 분..
• 넷플릭스 오리지널 <연애 실험 블라인드 러브: 결혼식 그 후> (2021)
- 블라인드 데이트로 처음 만나 바로 결혼한 것도 놀라웠는데.. 그 사단을 내고 2년 후에 다들 모여 기념일 파티를 하다니. 그 안에서 또 서로 싸우고 험담하고 피하고 난리 났다. 역시 미국 연애 리얼리티의 매운맛은 어나더 레벨.
7월에 맛있게 먹은 음식
• 울진-영양 여행에서 먹은 것들
금강 소나무숲길 등산하고 내려와 먹은 점심. 마을 주민분들이 직접 하신 집밥인데 맛없을 수 없었고. 울진 후포항에서 떠와서 먹은 회. 특히 오징어회, 도다리회가 맛있었다.
7월에 잘한 일
- 코로나가 이렇게까지 심해지기 직전인 7월 초, 가족들과 경북 울진-영양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울진의 소나무 숲, 영양의 자작나무 숲을 보러 간 숲 기행이었는데, 신비로운 풍경 속에 들어가 있으니 온갖 잡생각이 사라지고 마음이 절로 차분해지더라. 심지어 숲속에서는 핸드폰도 안 터져서 잠시나마 속세와 차단되는 짜릿한 경험을 했다. 앞으로도 마음이 복잡할 때나 현생이 너무 싫을 땐 잠깐 숲에 다녀와야겠다.
- 아주 오랜만에 다시 글을 써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너무 잘하려고 욕심부리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거 나다운 거 하자.
7월에 아쉬웠던 일
- 한동안 직장에 대한 고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새로운 일과 직책을 맡은 만큼 어떻게든 올해까지는 잘 버텨보고 또 잘해보고 싶었는데. 변수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지금 이 상황이 안타깝고,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무력감도 느낀다. 이런 애매함에서 언제쯤 탈출할 수 있을지.
7월에 행복했던 순간
1. 2시간 꼬박 땀 뻘뻘 흘리며 산에 오른 끝에 마주한 자작나무 숲 풍경
2. '뚫고 지나가요' 처음 들었을 때랑 오랜만에 쏟아지는 덕질 떡밥에 정신 못 차렸을 때
3. '골때녀'와 안산 선수 양궁 경기 보며 과몰입한 날들.. 스포츠 하는 단단한 여자들 최고 멋져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