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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터 Jul 24. 2021

'골 때리는 그녀들' 보고 축구하겠다는 여자가 있어?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내 정체성이 뭔지 모르겠어요. 내 삶이 축구 외엔 다 엉망이야." FC개벤져스 신봉선 선수의 인터뷰에 과몰입해 별안간 눈물을 흘리는 여성. 그게 바로 나다. 요즘 최고 인기 예능 프로그램 SBS '골 때리는 그녀들'에 출연..하진 않지만, 비슷한 시기에 축구를 시작해 지금은 축구에 거의 미쳐 살고 있는 한 시청자이자 취미 선수로서, 그 마음이 뭔지 너무 알 것 같았거든.




지난 2월 어느 날, 설 특집 파일럿으로 방영한 '골 때리는 그녀들'을 볼 때였다. 여자가 축구를 하는 장면 자체도 신선했는데, 무엇보다도 선수들이 다들 너무 진심이어서, 이 악물고 뛰고, 발톱이 빠져도 뛰고,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이기고 싶어 하는 모습이 뭉클했고 확 감정이입이 돼버렸다. 여느 예능을 볼 때처럼 처음에는 멀찌감치에서 누워서 보다가, 좀 더 집중하려고 꼿꼿이 앉아서 보고, 골이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일어나 껑충 뛰기도 하고, 나중엔 코앞에서 거의 화면 속으로 들어갈 기세로 봤다. 정말 재미있어 보인다. 나도 저기 끼고 싶다. 같이 뛰고 싶다..! 지금껏 나의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축구가 그렇게 단 2시간 만에 내 삶의 경계선 코앞까지 다가와버렸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뭔가에 홀린 듯이 검색창에 '여자축구'라고 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동호회에 대뜸 가입신청을 해버렸다. 진짜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나 원래 매사에 신중한 타입인데, 이렇게 고민 없이 충동적으로 저질러본 일이 없는데. 왠지 이것만큼은 꽂혔을 때 바로 해야겠다 싶었다. 마침 내가 사는 곳과 가까운 지역에 새로 창단하는 팀이 있으니, 바로 다음 주부터 합류하면 된다는 연락이 왔다. 어머, 나 진짜 축구하네.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이상하게 순조로운 이 전개가 썩 싫지 않았다.




3월의 첫 일요일, 다들 나처럼 '골때녀'를 보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축구 경력이 전무한 여성 열댓 명이 축구를 처음 배워보겠다고 모였다. 기술도 없고 룰도 모른 채, 나도 골 한번 멋지게 때려보고 싶다는 욕심 하나로 다들 정말 막무가내로 뛰었다. 나는 그렇게 격하게 오래 뛰어본 것 자체가 거의 한 10년 만이었을 거다. 몇 년 전 인대를 다쳤던 오른발에 다시 통증이 느껴졌고, 어렸을 때 천식을 앓았던 터라 호흡하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결국 첫 경기에서 골 맛은커녕, 체력도 멘탈도 탈탈 털린 빈털터리에 만신창이가 된 기분을 느꼈다.


분명 첫 경기 후엔 고통스러운 기억만 남았는데 그게 두 번, 세 번이 되고 딱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거짓말처럼 그 고통이 희열로 전환되더라. 숨차서 곧 쓰러지기 직전인 타이밍에 마침 나에게 공이 왔고, 조금만 더 뛰어가면 골을 넣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전력질주했는데 그때 잠깐 1초 정도 몸이 붕 뜨더니 말로 표현하기 힘든 해방감 같은 걸 느꼈고, 나도 모르게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뒤늦게 눈을 떠 골이 들어간 걸 확인하니 드디어 해냈다는 짜릿함에 온몸이 가벼워졌다. 이거였구나. 축구가 재밌다고 하는 이유. 다들 축구에 미치는 이유. 워낙 골이 많이 들어가는 아마추어 경기이긴 하지만, 나는 그날 50분짜리 경기에서 무려 세 골을 넣었다. 다시 생각해도 그 날은 좀 미쳤었던 것 같다.


그 후로 아주 심각한 축구 중독 증세를 겪었다. 일할 때도, 밥 먹을 때도, 자려고 누워있을 때도 눈앞에 푸른 구장이 아른거리고, 발에 닿는 모든 걸 다 뻥뻥 차 버리고 싶을 정도로 주체가 안됐다. 삶이 내 축구를 방해한다고 느껴지기까지 해서 내가 직장인인지 축구선수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일 스트레스가 심했던 어느 날은 다 때려치고 축구만 하며 살고 싶다 생각한 적도 있다. 때려치진 못하더라도 최소 주 3일은 축구할 수 있게 주 3일 정도만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 정도로 미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지인들은 이런 내 얘기를 들으면 '여자가 축구를 하다니, 심지어 저렇게 좋아하다니'라며 신기하다 내지는 특이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최근 '골 때리는 그녀들'이 정규 편성되고 인기를 끌면서부터는 '정말 그렇게 재미있어?'라고 호기심을 갖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그냥 축구를 몇 달 먼저 해본 사람으로서, 어느 날 갑자기 충동적으로라도 시작하길 너무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여자 축구도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고, 평범한 30대 여성 직장인도 얼마든지 축구에 미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니 '골 때리는 그녀들'을 보고 아니면 혹시 이 글을 읽고 '나도 축구 한번 해볼까?'라고 생각해본 여성들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정말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그 한 번의 결심이 당신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 나에게 축구는 그랬으니까.


"그래서 세상에 축구하는 여자들이 한 팀이라도 더 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축구는 재미있으니까. 너무 재미있으니까.
뭐가 됐든 재미있으면 일단 된 것 아닌가.
정말이지, 이거, 기절한다."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中



+) 만약 이 글 반응이 좋으면 축구가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꿔놨는지에 대해서도 하나씩 풀어나가 볼 셈이다. 주중에는 본업 해야 하고 일요일에는 축구해야 되니까, 토요일에만 글 쓴다. 다음 주 토요일에 두 번째 글을 올릴 수 있을지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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