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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터 Feb 10. 2021

나도 멋진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요

'같이 삽시다', '60세 미만 출입금지', '가시나들'을 보고

머리에 뭔가 반짝이는 게 묻어있길래 뽑아보니 그게 말로만 듣던 새치라는 거였을 때. 눈 밑에 생긴 게 피부 알러지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주름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을 때. 알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이전까지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던 나이 든 내 모습과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글쎄, 그게 정확히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거였을 테다. 나도 언젠가는 할머니가 되겠구나. 어떡하지 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갖고 있던 전형적인 '할머니' 이미지 같은 게 있었다. 99퍼센트의 확률로 뽀글뽀글 파마에 다 늘어난 꽃무늬 옷을 입었겠지. 마음은 다정하지만 말투는 거칠고, 인심은 좋지만 오지랖이 넓고. 남편과 자식들의 기에 눌려 늘 힘이 없거나, 아니면 억척스러운 성격으로 집안의 악역을 자처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양가 할머니와 내가 아는 모든 친척 할머니들이 그랬고, 친구들 할머니들도 그렇다고 하고, 드라마 속에 나오는 할머니들도 예외는 없었다. 내가 봐온 할머니들은 늘 그랬다. 다 똑같았다. 나이 들면 어쩔 수 없이 다 그렇게 되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이 드는 게 싫었다. 나도 그런 똑같은 할머니가 되기는 정말 싫었다.




그 편협했던 생각이 작년 어느 날을 기점으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는데, KBS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된 게 계기였다. 혼자 사는 60~70대 여성 연예인들이 같이 사는 이야기인데 그중에서 유독 튀는 한 할머니가 있었으니, 바로 배우 문숙. 나이가 들어도 차분하고 우아하게, 꾸준히 몸과 마음을 가꾸며, 젊었을 때 갖게 된 신념을 오래도록 지키며 살 수 있다는 걸. 판타지가 아닌 실존 인물이 그렇게 잘 살고 있다는 걸. 방송을 통해서나마 내 두 눈으로 본 첫 케이스였다. 사람은 어떤 태도와 가치관을 갖고 실천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늙어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40대에 최고의 인생이 시작되고, 60대가 되니 이제야 철이 드는 것 같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의 40대와 60대는 어떤 모습일지 조금씩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각각 이혼, 사별, 비혼을 이유로 혼자 사는 60대 여성들이 한 달 동안 셰어하우스에 살며, 서로의 친구이자 동반자가 되어주는 내용을 담은 EBS 다큐 프라임 <60세 미만 출입금지>에서는 약간의 희망을 발견했다. 첫 인터뷰에서 내 삶이 엉망진창이라며 울던 여성이 합숙 끝나고 마지막에는 똑바로 카메라를 쳐다보고 환하게 웃으며 "나 멋져요"라고 말할 때, 이것은 모두의 얘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나이 들어서 얼마든지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맞이하는 기적을 만날 수 있고, 거기에 핵심은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함께 성장한다는 거였다. 배려하고 의지하고 연대하는 마음에는 나이가 없는 거였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본 MBC <가시나들>에서는 이제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시골에 혼자 사는 할머니들이 사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문화/경제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분들이라 하루하루 힘들게 사시겠구나 지레짐작했는데 또 엄청 놀라고 말았네. 할머니들은 다 KBS1 아니면 TV조선만 보는 줄 알았는데 외국 프로레슬링 경기를 챙겨본다는 시골 할머니가 있었다. 젊었을 때 꿈이 가수였다는 할머니는 집에 노래방 기계에 사이키 조명까지 갖추고 있었고. 내 눈에 최고 멋져 보였던 분은 목 축이자고 맥주 한 병을 꺼내오시더니 60년 된 핵폭풍간지 빈티지 병따개로 뽕 따서 거품 안 나는 최적의 각도로 기울여 따르던 할머니. 비슷한 연배의 이웃들이고 힘든 시절을 살아냈다는 공통점만 가지고 흐린 눈으로 보면 다 똑같은 할머니들이지만, 총명한 눈으로 한 분 한 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자 좋아하는 게 다르고 자기만의 취향이 있는 고유한 인간이었다.


이걸 다 보고 나서야 알았다. 나이 들면  똑같은 할머니가 되는  아니라, 고유한 인간들이 각각 성숙해지는 거라는 . 어떤 모습으로 성숙해지는지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 가치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만의 취향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할머니, 어르신, 누구 부인, 누구 엄마도 아닌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새치와 주름이 있기 전의 나였다면 절대 보지 않았을 중장년 여성의 삶을 다루는 콘텐츠를 보고 나서 비로소 알았다. 세상에는 한 가지 정답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다양한 삶이 있다는 걸 조명하고 가시화하는 게 이렇게나 중요하다. 시청률이나 수익성 면에서는 크게 도움되지 않은 프로그램이었을지언정, 나이 드는 걸 두려워했던 30대의 한 여성 시청자는 그 덕에 구원받았다.




아침에 한 번 밤에 한 번,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조금씩 나이 들어가는 내 모습을 인정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거울 속 나는 40년 후 어떤 할머니가 되어있을까? 떠올려 본다. 부디 건강하고 편안하게 잘 사는 행복한 할머니가 되어있기를 바라지만, 그게 욕심이라면 딱 한 가지만이라도 꼭 지켜줬으면 한다. 나다운 할머니로 쭉 늙어가기. 나이를 이유로 주어지는 어떤 의무나 역할, 고정관념과 틀에 얽매이지 않고 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하며,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선택하며 살기. 미래의 내가 그 약속을 지켜준다면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나이 드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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