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리터 Dec 25. 2022

12월, 소중한 건 언제나
두려움이니까

2022년 12월의 월말 결산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까워 남겨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매달을 기록해 둡니다.




12월에 읽은 책

• <꿈은 없고요, 그냥 성공하고 싶습니다> - 홍민지

- 기성세대의 공중파 예능은 불편하거나 지루하고 10대들이 즐겨 본다는 날것의 웹예능은 어쩐지 난해해 그 사이에서 갈 곳을 잃었을 때, 내 또래를 위한 콘텐츠가 좀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온 게 '문명특급'이었다. 비슷한 추억과 경험, 비슷한 가치관과 웃음 포인트를 가진 사람들이 만든 콘텐츠는 시청자들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걸 처음 느꼈다.

 이제는 이런 글이 좀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뻔하게 노오력해서 성공했다는 얘기 말고,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돌판에 새로운 균열을 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젊은 전문 직업인들의 일 이야기가 더 많이 발굴되고, 공유되고, 세상에는 이런 길도 있다는 걸 널리 보여줬으면 좋겠다. 열심히 일해온 사람의 역사는 누구에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자극을 주거든.

"내 경우엔 스스로를 칭찬하는 정도와 자괴하는 정도의 밸런스를 맞출 때 자존감이 더 높아진다. 본인을 사랑하기만 했을 때는 오히려 내 약점을 들키기 싫어서 남들에게 그 화살을 돌리는 경우가 생긴다. 반대로 자괴하기만 했을 때는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래서 나는 나를 사랑하는 정도로 나에 대한 검열과 자책도 하는 편이다."

"자신의 본업을 충실히 잘 해내려면 다른 사람의 본업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연출자가 본업인 나는 화면을 채울 때 출연자의 본업에 방점을 찍으려 노력한다. 모든 사람들의 본업은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는 걸 전하고 싶다."

"대표가 내놓은 해결책은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매번 최고점을 받는 것보다 가끔 최저점을 받아도 평균값을 유지하는 게 오래 버티는 비결이라고 했다."

"앞으로도 못하는 일은 그냥 안 하면서 살 것이다. 나 말고도 잘하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널렸는데 나까지 뭐 하러 잘하려고 아득바득 애쓰며 살아야 하나 싶다. 대신에 내가 잘 못하는 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고, 누군가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기꺼이 도와주면서 상호보완적인 인간관계를 만들고 싶다. 여태껏 나는 못하는 걸 포기하면서 생존하는 대신에 누군가와 협업하는 능력을 키우는 중이다."


• <IT 회사에 간 문과 여자> - 염지원 

- 여기도 기성세대, 전공자 중심, 남초 카르텔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가는 젊은 여성 프로페셔널 이야기.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포기하는 부분들도 절대 참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하고 발전시키고 싶어 하는 저자가 꽤 멋지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를 살게 하는 것은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지고 있다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운동감이다."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내가 재능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개인 안에 내재된 창조성을 발현해줄 자신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큰 변화를 줄 수는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멋이 없었다."


12월에 즐겨 들은 K팝

• 뉴진스 'Ditto'

- 나의 2022년 12월은 디토를 듣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감정선의 변곡점이 된 곡. 아련한 뮤직비디오 side B의 정서를 특히 좀 더 아낀다. 대천재 짱진스 좋아하지 않는 방법 나는 이제 몰라..


• RM 'No.2' (feat. 박지윤)

- 박지윤 언니의 새 음악 활동이 반가워서 앨범에서 제일 즐겨 들었던 곡. 연말이라 그런지 더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도 괜히 위로가 된다. "그대여 더는 뒤돌아보지 마, 선명히 뒤섞인 기억 뒤에, 이 남은 삶들은 덤처럼 남아 최선을 넌 다했을 뿐이야"


• 존박 'Love Again', 'Sipping my life' 

- 캐롤 느낌의 신곡 '러브 어게인'을 듣다가 문득 이 남자의 목소리는 지금 딱 이 계절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내내 거의 존박 노래만 찾아들었다. 그러다 아주 제대로 꽂혀 버린 노래가 바로 'Sipping my life'. 이 노래 가사처럼 온갖 고민들은 병에 넣어 놓고 숙성되길 기다리고, 나는 덤덤히 지금 내 삶을 딱 한 모금씩만 마신다는 자세로 그렇게 살아야지. 


그리고 나 홀로 도쿄 여행을 위해 준비해 간 도쿄 플레이리스트, 단연 원탑은 이 노래  


12월에 본 영화와 드라마

• 영화 <김씨표류기> (2009)

- 의도치 않게 무인도에 고립되어버린 사람도, 방 안에 스스로를 고립시켜버린 사람도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고, 생각하고 있고, 기다리고 있다는 걸 인지하는 감각으로부터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 이 세상을 결코 혼자서만 살아갈 수는 없다는 걸 또 한 번 느낀다. 지독히 외로워도 둘러보면 어딘가에 내 마음을 알아 줄 이 하나쯤은 있다. 소통하자. 서로의 표류에 서로의 방파제가 되어주자. 

+) 거의 인생영화일 정도로 명작인데, 포스터 만든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 왓챠 오리지널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2022)

-  주인공이 크게 아프거나 시한부 설정인 작품을 잘 못 보는데, 이 작품은 한석규와 김서형이라는 배우의 힘이 너무 대단해서 거부할 수가 없다. 이렇게나 담백하고 정갈한 신파극이라니. 난생처음 맛보는 싱거운 매운맛에 중독되어 매주 새 에피소드를 기다리게 된다. 

"준비가 되길 기다려주는 일이 얼마나 있겠니. 맞이하는 거지."
"그리움만으로도 사람은 죽을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매일매일 그리워할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감정이 북받칠 때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자. 그러면 감정에서 소금기가 빠질 것이다."


•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

- 해리와 샐리는 결국 둘이 만났어야 했다는 거에는 공감하지만, 해리가 너무 싫어서 몰입이 잘 안 됐다. 함부로 상대 평가하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믿고, 감정 컨트롤 못하고 나중에야 후회하는 전형적인.. (이하 생략) 


12월에 간 카페

- 성수 더반 베를린 코리아, 성수 버치커피, 도쿄 오니버스커피, 도쿄 푸글렌, 도쿄 카멜백, 도쿄 카페드람브르, 신사 맥코이커피, 압구정 고이스트 에스프레소바, 성수 카페 이페메라, 성북 카페 케이드, 성북 히도커피, 종로 파이키 


12월에 한 생각

- 매년 이맘때 조금 우울해지는데 전반적으로 행복했던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좋아하기 시작하면 생기는 이름 모를 슬픔" 디토에 달린 천재 댓글이라고 요즘 SNS에 돌아다니는 이 문장이 딱 요즘 내 마음이다. 연말이라고 지난 날들을 돌아볼 일이 많았는데, 올 한 해 삶이 너무 만족스럽고 더할 나위 없이 좋았어서 모순적이게도 아주 가끔은 슬펐다. 언젠가는 사라지거나 끝나버릴 걸 아니까. 이게 마지막이면 어떡하지? 곁에 있는 사람이 떠나면 어떡하지? 어쩔 수 없는 이유들로 내 삶에서 소중한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어떡하지? 사서 걱정하는 스타일이라 굳이 그런 생각을 벌써 하고 미리 상처 받는다. 


- "함박웃음을 지었지만 울음이 날 것도 같았어 소중한 건 언제나 두려움이니까." 다행인 건 그럴 때 '사건의 지평선'을 들으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다는 것. 언젠가 다가올 이별이 너무 슬프지 않게 "산뜻한 안녕"을 외치는 법을 마음속으로 연습해보는 요즘이다. 막상 닥치면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조금 더 의연하게 받아들이자는 마음으로 미리 되뇌어본다. "끝이 아닌 새로운 길모퉁이"라고. 다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12월에 있었던 일들

- 혼자 도쿄 다녀왔다. 3년 7개월 만의 해외여행이었지만 세 번째 가보는 도시라 그런지 낯섦 설렘 이런 감정은 거의 없었다. 3박 4일 동안 온전히 혼자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것만이 여행의 목적이자 이유였다. 20대 때에 비하면 정말 많이 독기 빼고 욕심 덜고 천천히 흘러가는 대로 다녔고, 덕분에 여행은 꼭 새로운 영감과 자극과 경험을 그득그득 채워 넣는 과정이 아니라 비워내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 


- 오다이바 해변가에 혼자 앉아 바다 너머 도시 야경을 바라보며 노래 듣던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공기는 고요한데 빛은 황홀했던 그 순간이 꿈같아서, 지금 멀쩡히 잘 살아있는데도 앞으로도 계속 살아있고 싶다는 생각을 새삼 했다. 데이식스의 'You make me'를 듣고는 잠깐 울컥해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사람 감정 취약해지게 만드는 유죄 가사.. 그동안 나를 붙잡아 준 수많은 손들과 고마운 얼굴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한껏 물러진 마음을 핑계 삼아 다짐했다. 나도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거라고. 내년에는 더 용기 내어 사랑과 다정을 표현해 보겠다고.


- 연말이라 송년회라는 이름으로 잡힌 몇몇 모임들에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 하나같이 애틋하고 소중했다. 좋은 사람들에게 내가 더 잘해야지.


12월의 베스트 모먼트

1. 도쿄 요요기공원에서 뜻밖의 가을을 만났을 때 

2. 고마운 마음을 나눴던 모임 자리들  

3. 가족들과 함께한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엄마 아빠의 깜짝 합주회 


더 많은 이야기는 곧 2022 연말결산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